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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자 - 눈

"젠장, 매브. 일어나."

피트 미첼은 그렇게 일어난다. 층층이 선 계단식의 철제 좌석 너머로, 슬라이더의 삐죽 솟은 머리를 굽이굽이 넘어 보이는 것은 성난 교관의 눈썹이었다. 우측 벽에 가지런히 박힌 시계를 게슴츠레 바라보고서야 그는 복기가 진행되고도 남을 시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이건 전부 전날의 망할 훈련과 망할 교본 탓이다. 그렇게 두꺼워서야 전부 외울 수나 있겠는가. 

"매버릭?"

"예."

"예의 이 상황에, A 점에서 자네가 기동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몇 가지가 되겠나?

"어, 고도까지 고려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적기가 좌측 하단에 위치한 상황에서 제 기체는 최하 여기까지..."

 

아마 뒷좌석의 망할 놈들이 키득이는 소리일, 어쩌면 깎아낸 연필의 사각이는 소리일 수도 있을 법한 소음이 그의 귀를 때렸다. 조용히 좀 해줘, 구스. 노골적인 눈짓에도 건너편의 RIO는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다. 이제 보이는 것은 그 망할 놈들이 짓는 따뜻한 웃음이다. 두 눈을 깜박이자 그것은 도로 교관의 모습으로 어지러진다. 젠장. 잠을 너무 오랫동안 쪼개 잔 탓이다. 쓰러진 듯이 누운 모양새가 퍽 처량했다. 명치가, 다리가 쪼개지듯 아팠다. 물이라도 챙겨 먹어야겠는걸. 어지럽게 사고하며 그는 답변을 마무리 지었다. 졸린 눈꺼풀을 최대한 치켜뜨면서.

 

"나쁘지 않은 답변이군. 다음에는 잠부터 깨고 출석할 수 있도록 해라."

 

키득이는 소리가 울린다. 그의 RIO는 이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말을 짓씹으며 고개를 상 바닥에 박는다. 그래 봤자 책상인지라 크게 아프지는 않을 터였다. 잠은 깰 수 있겠지만. 미첼은 다시 한번 머리를 박는다. 닿는 감촉이 차가웠다. 그 철제 책상은 머리에 닿을 때 차가웠고, 시렸고, 바삭했고, 또 부드러웠다. 어? 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갈색 나무 무늬가 조악하게 덧칠된, 누가 봐도 철로 만들어진 군용 책상이다. 역시 잠이 덜 깼군. 언젠가 그의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피트 미첼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스! 말해 줄래? 뭐를. 나 좀 일어나라고. 그리고 잠에 들었다.

 

"이제 좀 일어나지 그래, 매버릭."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은 삐죽 솟은 금발의 머리칼. 너 뭐야. 뭐긴 뭐야, 네 동기지.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그는 얼음이다. 다른 부분은 전부 사람의 그것과 같은데, 이상하게 두 눈이 투명하다. 눈이 원래 투명하던가? 기억하기에 미첼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진짜로 뭐냐니까. 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여기가 어딘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 그는 말한다. 라커룸이지. 라커룸에 내가 있으면 안 되나? 뭐, 안될 거야 없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잠이나 깨고 말해, 매버릭. 오늘 훈련에서 쓰러져서 내가 데리고 나왔잖아. 그랬던가? 내가 쓰러졌었나? 그런데 왜 이놈이 나를 데리고 나오지? 구스가 아니라?

 

"구스는? 구스가 아니라 왜 네가 나를 데리고 나온 건데?"

 

마주한 카잔스키의 얼굴은 어두웠다. 마치 슬픔의 구렁텅이에 잠겨 있던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떼 내어 차가운 그의 얼굴 위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저 자식은 저런 표정 지을 줄 모르는데. 속으로 성급한 결론을 내린 그는 통통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됐어. 모르겠고, 난 관사로 간다. 회색 관물대 옆에 기대어 멍청하게 서 있는 그 자식을 가뿐히 지나치며 매버릭은 말했다. 다음부터는 좀 빨리 깨워 주던가. 뭐? 네가 날 깨웠잖아. 아니야? 나 쓰러졌었다며?

 

"넌 그랬다는 애가... 됐다." 

 

그 맹한 얼굴을 지나칠 때 미첼은 쾌감마저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아이스맨을 약 올렸다는 정복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투명한 눈동자의 그를 스쳐 지날 때 느껴진 찌르는 한기에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매브. 일어나."

 

다시 만난 아이스맨의 얼굴은 투명했다. 얼음으로 만든 흉상을 그대로 깎아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목 없는 흉상에 붙여 놓은 모양새였다. 강렬한 태양빛이 그를 겨냥해 쬐자 나타난 것은 사방으로 산란하는 빛의 향연이었다. 젠장, 눈부시다고. 너 대체 얼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무슨 관리를 해. 그냥 사는 거지. 그렇게 대답한 그는 웃고 있었다. 옆을 봐. 그가 말한다. 

 

그렇게 사방이 어두워졌다. 커튼을 친 암실 속에서 그나마 눈에 밟히는 것은 짜증 나게도 투명한 아이스맨의 머리통과, 그를 닮은 키가 큰 사내들의 비죽 솟은 머리통이었다. 죄다 머리통뿐이잖아!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미첼은 겨우 말했다.

 

"뭔데. 나 아무것도 안 보여."

 

그 소리를 신호로 삼은 듯 일순간에 불이 켜졌다. 생일 축하해, 매버릭! 삐뚤빼뚤 그려진, 쓰이지 않고 그려진 글자 너머로 커다란 케이크가 보였다. 흰색 생크림으로 마무리된 과일 케이크였다. 꾸밈 따위 없는 투박한 생김새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아마 저기 기대에 차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저 시커먼 자식들이 직접 만든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모르는 척도 해 주고 그러는 거지.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그의 전우가 촛불에 불을 붙여 주고 나서야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 끌어안은 그의 머리는 여전히 얼음이었다. 이상하게도 구스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픈가? 하긴, 아픈 몸으로 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달라는 건 그것대로 예의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미첼은 또 잠에 들었다. 아이스맨의 어깨에 얼굴을 폭 기댄 채로. 

 

"미첼, 일어나."

 

침대 옆에 기대어 선 아이스가 미첼을 부른다. 온몸이 뻐근했다. 베개 밑으로 넣어 밴 팔뚝이 축축해 꺼내어 보니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다. 미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스를 바라본다. 그의 아이스는 무슨 뜻이냐는 등 멀뚱하게 서 있다. 아침 먹을래? 네가 좋아하는 팬케이크 구워 놨어. 나 시럽이랑 크림 없으면 안 먹는 거 알잖아. 어제 크림 다 떨어졌다고 그러지 않았어?

 

"아침에 사 왔어. 저기 저 슈퍼 가서."

 

미첼은 졸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다 탁상 옆에 놓인 작은 알람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아침 여섯 시 아니야?

"응."

"근데 나가서 사 왔다고?"

 

이 날씨에? 미첼은 말을 삼켰다. 나를 위해 수고해 준 그의 헌신을 말 한마디 값의 배려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창밖은 매섭게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얼마나 눈발이 셌는지, 거의 하얬다. 그 탓에 우측으로 두 개의 창이 난 관사, 미첼의 방은 마치 두 점의 새하얀 캔버스를 걸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고마워, 아이스. 다시 돌아본 아이스는 몸의 절반가량이 투명했다. 멋지니까 됐어. 그렇게 말하며 미첼은 아이스를 끌어안았다. 맞댄 입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미첼. 왜? 이제 정말 일어나야 하지 않겠어? 뭐를? 알잖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매버릭은 말했다. 중요한 건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거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또 아이스는 말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아는데? 다시 매버릭은 말했다. 나를 깨워주잖아. 아이스는 말했다. 그런 거 말고. 매버릭은 말했다. 음, 새벽같이 나가서 저 눈발을 뚫고 크림을 사다 줬으니까? 

 

"무슨 소리야, 매브. 눈은 온 적이 없어."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미첼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바라본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녹음이 우거진 숲이었다. 온통 초록색이었다. 그제야 너랑은 언젠가 숲에서 살고 싶다던 자신의 오래된 투정이 떠올랐다. 그의 아이스는 그 말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역시 잠이 부족하단 말이야. 비행복을 입은 미첼은 궁시렁거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잠에 들었다.

 

"일어나야지, 미첼."

 

눈을 뜬 미첼은 눈에 있었다. 말 그대로 널부러진 채였다. 그는 그의 오래된 헬멧을 쓰고 있었다. 왜 헬멧을 쓰고 있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눈이 아니었다. 광활한 설원이었다.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지평선은 새하얀 눈 더미가 그 빛을 모조리 반사하고 있는 탓에 전부 흐릿하게 보였다. 눈앞에는 온몸이 투명해진 아이스가 있었다. 멋진데, 아이스. 요즘 유행하는 패션인가봐? 미첼은 자신의 목소리가 낮아졌음을 깨달았지만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거 1이 격추되었습니다! 뭐가 됐든 자신의 곁에는 아이스가 있었다. 아이스가 미첼을 이 눈더미 밖으로 꺼내어 줄 것이었다. 

 

"아이스, 나랑 같이 가자. 여긴 너무 춥잖아?"

"어디를?"

"어디긴, 우리 집으로 가야지. 나 네가 만든 팬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었어."

"그 팬케이크가 그렇게 맛있어?"

"넌 가끔 이렇게 당연한 걸 묻는단 말이야."

"그런가."

"그래. 나랑 같이 집에 가자. 집에 보내줘."

 

너를 보고 싶었어. 미첼은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를 직접 보면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바라는 그가 눈앞에 서 있음에도, 미첼은 말을 꺼내는 순간 무언가 불가해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않기로 한 것이다.

 

"매버릭, 일어나야지."

"너 나를 왜 매버릭이라고 불러?"

"왜긴 왜야, 너는 매버릭이니까."

 

어딘가 이상한 느낌에 미첼은 오른 팔뚝을 다시 들어 올렸다.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이스는 아직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미첼은 거칠게 장갑을 벗어던졌다. 마주한 것은 주름지고 흉진 남자의 손이었다. 이게 뭐야? 일어나야지, 미첼. 대거 1이 격추되었습니다! 대답해. 일어나. 대답하라니까? 일어나. 

 

그의 아이스는 고장 난 태엽 인형마냥 그저 일어나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매버릭은 고개를 떨궜다. 시야를 물들인 새하얀 눈. 그리고 물었다.

 

"저기 말이야, 아이스. 너는 눈을 좋아해?"

 

 그러자 아이스는 대답했다.

 

"응, 미첼. 너를 사랑해."

 

그랬구나. 미첼은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딘가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였구나. 뭐가? 네가 나를 깨웠구나. 미첼, 나는 언제나 너를 깨웠잖아. 아냐, 그거 말고. 다른 거 있어. 

 

아이스는 계속 미첼을 바라보았다. 눈길은 따뜻했다. 모든 것이 차가운 눈발 위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따스한 것은 얼음으로 빚어진 남자의 두 눈이었다. 그제야 미첼은 알 수 있었다. 네 눈은 회색이었지. 그래, 네 눈은 회색이었어. 

 

"이제 알겠지?"

 

아이스는 말했다. 대거 1이 격추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이 든 남자는 굳건히 선 얼음 동상을 바라보며 말한다. 응. 알고 있어.

 

아이스가 입술을 주억거린다. 무슨 말을 하는 것만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전투용 비행복과 헬멧을 쓴 미첼은 환하게 웃으며 겹겹이 쌓인 눈 위로 쓰러졌다. 너는 눈이야, 아이스. 이제 나는 절대 다치지 않아. 그리고 잠에 들었다.

 

대거 1이 격추되었습니다! 미첼 대령은 눈 위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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