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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랑 - 사랑과 신념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보통의 장교들은 위관급에서 식을 올리기에 영관급의 장교들의 식은 흔치 않았다. 그렇기에 높은 계급 만큼 그 위치에 어울리는 고위급 장교들이 대거 참석했다. 화려한 그들의 어깨와 가슴에 제 상관을 보좌하기 위해 동석한 보좌관이 혀를 내둘렀다. 선임들의 술자리에서나 흘리듯 들을 수 있던 이름들이 가슴에 박힌 채 돌아다니는 살아있는 박물관과 다름 없었으니.

 

이 날의 주인공은 아이스맨이었다.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보통 아이스맨이라 기록되었으나 부르는 형태로는 '아이스'가 가장 많았다. 해군사관학교를 거치고 탑건에 차출 되어 끝내 수석 졸업을 한 아이스는 결혼 시장의 굉장히 훌륭한 매물 중 하나였다. 흠 잡을 데 없는 임무 수행 능력에 모난 데 없는 외모와 신체는 딸을 가진 장성들에게 흡족한 매물과 다름 없었다. 게다가 이대로만 계속 해 군생활을 한다면 본인들이 일궈 놓았던 그 탄탄대로를 밟고 더 길게 국방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는 훌륭한 키이기도 했다. 그와 관련된 선 자리는 솔직히 아이스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갓 대위를 지나 소령 진급이 기정사실화 되는 순간부터 있었다. 진급 탈락의 가능성이 열리는 그 약육강식의 개 싸움 판에서 아이스가 영관의 길을 열고 걷기 시작 했을 때 아이스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달라졌다. 더 높은 세상에, 더 큰 시야를 위해 그 앞에 놓여진 다양한 여자들. 남초 사회에 물들은 장성들은 그에게 언제나 외도를 해도 좋다고 말 했다. 마치 자신들의 세상을 세습하기 위해 양자를 들이듯, 조금씩 들어오는 압박 그리고 권유에도 아이스는 이렇다 할 그들이 원하는 긍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떳떳할 수 없다면 제가 걷는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인지에 대해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함께 하늘을 날기로 했었던 누군가가 웃는 얼굴을 부끄럼 없이 마주 봐야 함에 있어서, 광활한 하늘 위 길을 내어 새로움을 개척하는 우리에게 먹구름 따윈 인위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아이스."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식장 앞에 서서 하객을 맞이하던 아이스를 불렀다. 잠시 넋을 놓았던 건지 초점이 흐린 눈으로 서 있던 아이스가 정신이 들은 듯 고개를 움직여 소리의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얀 정복을 입은 매버릭이 웃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같은 계급이었던 둘의 차이가 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먼저 소령 진급을 위한 점수와 훈련시간 이수를 마쳤던 매버릭이기에 그가 먼저 진급할 것이라 생각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간의 평판은 쉽게 그를 위관의 자리에서 올리려 하지 않았다. 매버릭 역시 그다지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그 자리를 아이스가 차지한 것도 온 마음을 다해 축하 할 뿐이었다.

베스트맨으로서 아이스의 가장 최측근 자리에 앉아 식을 축하 할 인물이었다. 떨린다며 정말 '해군'의 결혼식에 중요한 위치로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라 말 하던 매버릭이 마지막 말을 마치기 전에 어색하게 입술을 핥았다. 버석한 그의 분홍빛 입술이 약간의 물기를 머금고 촉촉해졌으나 이내 다시 건조함만 남아 쉽게 위아래로 벌어지려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이스가 가만히 그 입을 쳐다보다 눈을 맞췄다. 매버릭은 쉽게 말을 꺼내는 남자였으나 그 속내를 담은 진중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는 꽤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인내심이 소요되는 시간이 아이스에겐 그저 즐거움과 다정함의 시간이었다. 재미있었거든. 이 남자와 나누는 시시콜콜한 모든 이야기가.

 

"아이스. 음."

"음?"

 

까만 눈썹 사이 미간을 통해 이어지는 코 끝이 찡긋하며 살풋 주름이 잡혔다 사라졌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 이렇게 뜸을 들이나, 아이스는 그저 온통 긴장한 채 제 앞에 서 있는 매버릭이 귀여웠다. 그리고 한참을 이어지는 침묵 속 재촉 없이 부드러운 입꼬리로 마주하던 아이스의 입꼬리가 뚝 떨어진 것은 얼마나 커다란 일이었을까.

 

"솔직히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알잖아. 나 콜사인부터가 고집불통 꼴통인걸."

"그래서? 또 오면서 사고라도 친 거야?"

"아니. 이제 칠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 아니면 더 이상 이 사고 칠 기회가 없을 것 같거든."

"실시간으로 사고를 치겠다고? 전투기도 없는데?"

"그게 아니라."

좋아해.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하는 게 맞아. 그것도 꽤 큰 감정인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인정하지 못 하고 오래 방황 할 줄 몰랐거든.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나한테 너무 큰 문제와도 같아서 결혼식 준비를 하는 너와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 했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 알 수 없었거든.

 

아이스의 왼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행동을 본 매버릭이 웃었다. 지금 아이스는 이해하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그의 습관이 그것이었다. 서슬퍼런 회안의 안광이 더욱 뚜렷해지고, 눈매가 가늘어지며 왼쪽 눈썹이 움직인다. 그 모습에 매버릭 역시 제가 실수 했음을 인지하는 듯 아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아이스가 단박에 눈치 챌 수 있는 그의 가장 기본적인 습관 중 하나였다. 서로의 습관까지 익숙하게 알아 챌 수 있는 사이의 두 사람이 잠시간의 침묵 속에 표류 되었다.

"그... 아, 흠.. 그렇게 이런 자리에서 말 하면 안 되는 것 알아. 물론! 물론, 너의 미래를 응원해. 하지만 우리는 친구잖아. 이 정도의 회한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어."

"..."

"말 하지 않으면 너랑 멀어질 것 같아서."

"...지금 그 말을 하는 이 상황은 멀어지지 않음의 전초인가?"

"별 수 없잖아. 넌 너의 길이 있는 걸. 무언갈 바라고 말 한 건 아니야.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가장 바쁜 날 너에게 부딪혀 흩어지는 수 많은 꽃잎 중 하나처럼 잊혀질 말로 끝내고 싶었을 뿐이야."

"..."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 해. 마지막이야. 너의 신경을 긁는 건. 그니까 이해해 줘. 그리고 축하해. 네 결혼."

먼저 어색하게 자리를 뜨는 매버릭 뒤로 아이스가 있었다. 마저 식장으로 들어오는 하객을 맞으며 온통 집중을 하지 못 했다. 매버릭에게 시선이 이어졌다. 샴페인 잔을 들고 쾌활하게 웃는 신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매버릭이 보였다. 아무래도 훤칠한 제 외모 만큼이나 달콤한 축하의 말을 내뱉은 것인지 아이스의 예비 신부가 웃었다. 테이블 위에 진열 되어 있는 샴페인 잔을 들어 신부의 잔과 부딪힌다. 잘 마시지도 못 하면서. 늘 기분만 내듯 들고 있다가 내려 놓는 것이 일상인 그가 낮은 도수의 샴페인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알코올'이기에 어떠한 자리에서도 기피하려 했던 것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온통 긴장했던 듯 수분을 채우지 못 해 고생했던 나그네가 오아시스를 만난 것 처럼.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각자의 자리를 찾아 하객들이 앉았다. 별 천지였다. 소령 아이스의 직급에 어울리지 않는 굉장한 고위직 장교들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저와 결혼 할 여자의 집안 덕이었다. 별이 세 개였다. 에어보스. 4성 제독의 자리가 공석만 된다면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위치의 장인은 아이스에게 과분할 만큼의 권력을 쥐어주겠다 했다. 어차피 나아갈 것이라면 바람길을 타고, 순항을 하는 것도 좋다며 가장 큰 선물을 약속 한 사람이었다.

신념은 젊음을 주지만, 명예는 미래를 준다 했다.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해 주겠다 했다.

 

이 말이 마음에 닿았다. 그래서 응했다. 거래라고 하고 싶지 않았고, 내 세상을 구축하는 또 다른 방법을 만들었다고 생각 할 뿐이었다.

식의 순서에 따라 아이스가 발을 내딛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 순간 아이스를 향했다. 신랑 측, 가장 맨 처음 이름이 적힌 초대장이 놓여졌던 그 자리에 그가 앉아있었다.

 

피트 매버릭 미첼.

아이스의 신념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명예를 향해 계속 된 길을 가야 할까, 저를 향해 웃고 있는 신념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말 해 보라며 재촉이라도 해야 할까. 아이스의 걸음이 멈췄다. 문득 끊긴 움직임에 정신이 든 아이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박수를 치며 웃고 있는 하객들이 있었다. 저를 반기는 사회자가 있었고, 제 부모님과 이제 가족이 될 새로운 처가 부모님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벌려진 입술 새로 짧은 한숨이 뱉어졌다.

 

매버릭과 함께 자리를 지키는 베스트맨들을 지나쳐 그 끝에 선 아이스가 웃었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서 수줍은 얼굴의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이라도 삼킨 듯 침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껄끄러워 습관처럼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사랑과 신념

 

신부에서 이내 아내가 된 여자는 모난 곳 없이 훌륭한 여성이었다. 답답한 군인 집안의 자녀로 태어나 꽉 막혀 있을 거란 선입견을 부수듯 밝았고, 맑았으며 다정했다. 결혼을 전제로 잠깐의 교제 기간을 가질 때에도 언제나 아이스의 업무 환경을 배려 해 주었다. 물론 아이스 역시 최선을 다해 그녀의 곁을 지키려 했기에 커다란 불협화음은 일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스 곁에는 자신 외에 다른 여자는 없는 것이 분명 했으니.

 

아이스의 손가락에 새로운 반지가 끼워졌다. 그보다 더 큰 해군사관학교 졸업 반지를 낄 때에도 없던 압박감이 그 작고 날씬한 결혼 반지에서 느껴졌다. 손가락이 길고 가늘어 자주 여러 반지나 고리를 끼고, 걸던 습관이 있어 이 정도의 얇은 반지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오히려 이따금 위험한 주행은 옳지 않다며 톰캣 키링을 채워 둔 매버릭의 가와사키 바이크 키를 손가락에 걸 때가 더욱 두툼했었다. 아! 미안해! 알았어! 안 해! 안전하게 다녀 온다고! 작은 제 키로 폴짝 폴짝 뛰며 하늘로 쭉 뻗어 올린 손 끝에 걸린 키를 뺏고자 고군분투하던 녀석이었다. 문득 찾아온 추억에 아이스가 웃었다.

"톰. 무슨 생각 해?"

 

식탁 맞은 편에 앉아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여자가 물었다. 입 안에 남은 음식물을 마저 씹으며 아이스가 별 것 아니라며 말을 끊어냈다. 식기를 놓은 손이 허전 해 엄지를 안으로 말아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살짝 튕겼다.

홀로 식사를 챙기던 시절엔 자주 건너 뛰던 아침이었다. 아니면 조금 일찍 부대에 출근 해 장교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곤 했다. 해 봤자 사과와 매버릭이 마시면 죽는 거 아니냐며 학을 떼던 수준의 새까맣기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신경이 날카로워져 쓰린 속을 달랠 때에는 거품이 가득한 카푸치노. 어쨌거나 카페인이 너무 강해 건강 해친다며 걱정하는 매버릭의 잔소리가 있었지만.

출근 길 마주치는 후임들이 먼저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준 아이스가 제 집무실로 향했다. 더 이상 생각 없이 하늘을 날던 현장 업무보다는 육지 데스크 업무가 많아지는 과도기에 위치 해 있어 익숙하지 않은 것 투성이었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의 기분을 점치던 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뭐가 맞는 것인지 온통 낯설어 연거푸 한숨만 쉬기도 했다. 이따금 비행 훈련이 이루어지는 시간에 맞춰 전투기 이착륙 소음이 들려왔다. 햇빛에 내렸던 블라인드를 올리며 아이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활주로를 타고 시원하게 이륙하며 전투기가 굉음을 내었다. 비행 훈련장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눈 앞에 있는 것 처럼 가슴까지 울릴 듯 들려와 괜스레 설렘이 일었다. 마치 매버릭과 함께 전투기를 타고 비행 하던 때 처럼.

 

식을 마치고 돌아 서 나오는 버진로드 끝, 온갖 꽃잎이 흐드러지며 하늘에서 비처럼 내렸다. 그 날 찍힌 사진들은 온통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아이스의 객관적인 시선에서도 아름답게 보여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이 이렇게 웃고 있었는지 체감조차 되지 않았다. 신부의 이마에 내려 앉은 꽃잎을 가볍게 손 끝으로 치우며 그 자리를 제 입술이 채웠던 사진은 유독 마음에 박혀왔다.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을 위해 가장 화려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뜯어진 생화였다. 코 끝을 가볍게 스치던 꽃 내음. 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더없이 아름다웠던 순간. 그 영롱한 푸름과 순백의 조화 사이를 아름답게 꾸미던 꽃잎이 온통 매버릭의 고백으로 보였기 때문에. 몸에 부딪혀, 몸에 차마 닿지 못 하고 바닥으로 추락 해 버린 채 구두 발에 짓이겨진 꽃 잎처럼 잊혀질 것이라 했다.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한 고백이라고 했다.

 

갓 영관이 되어 많은 권력은 없었으나 매버릭을 대신 하여 소소한 잘못이나 사고에 대해 대신 처리하고자 고군분투 했던 아이스였다. 그 때 자신이 했던 말이 무엇인가? '괜찮아. 이제 다 잊어. 나도 다 잊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렇게 자신의 잘못에 대해 대신 개고생 하는 본인을 보며 온통 비 맞은 다람쥐처럼 구는 모습이 귀여워 한 껏 크게 웃고는 짐짓 혼 내듯 했던 말이었다. 그러면 매버릭은 제 말을 그대로 듣고 곧장 잊어버렸고, 아이스 본인 역시도 자신이 닳도록 숙였던 고개, 억지로 올렸던 입꼬리의 수난을 잊었다. 그렇게 쉽게.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의 말도 잊어야 했다. 흘러가듯, 성별을 떠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쉬이 일어 나는 그런 단순한 감정의 착각으로 치부하듯이.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시간을 더하고, 날을 더 해 갈 수록 매버릭이 머리에 박혀 떠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매버릭을 싸고 돌았던 저였다. 그러기에 혼동하는 것이라 생각 했다. 처음 인도양 임무를 끝냈던 날 목숨을 살려준 그 작은 말썽꾸러기가 못다 할 정도로 사랑스러워 그렇게 끌어 안고 경계심도 풀었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생각 했다. 애정의 감정도 아니라고 생각 했다. 굳이 꼽자면 동료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 했다. 미션과 보고가 모두 끝난 후 항모가 항구에 닿기 전 전투기 조종사로서의 특혜로 먼저 항모를 떠날 수 있었음에도 아이스는 매버릭과 함께 항구에 정박 할 때 까지 항모에 남아 있었다. 슬라이더, 멀린까지 함께 했었던 4인실은 하나 둘 씩 비어가는 숙소로 아이스와 매버릭 둘이 사용 하는 2인실이 되었다. 꼭 꽉차게 있을 필욘 없지 라며 비어진 타 4인실을 쓰던 슬라이더와 멀린이 나갔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종래엔 RIO로써 파트너 파일럿이 날지 않으니 답답해 했던 슬라이더와 멀린이 업무 차 왔었던 다른 파일럿의 뒤에 타고 먼저 항모를 떠나 버렸다.

그때 쯤, 구스의 군번줄을 버리고 왔다며 맞은 편 아래 칸에 누워 잠의 늪으로 빠지던 아이스에게 말을 걸었던 매버릭이었다.

 

온통 하얗고, 까맣고, 초록색 뿐인 그 얼굴에 눈물 방울이 가득 들어찼었다. 목 놓아 울며 한 번도 이렇게 울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누구도 묻지 않은 책망과 짊어지지 않은 죗값은 오히려 역으로 매버릭을 갉아 먹었었다. 그렇기에 누구를 위로해야 할 지도, 무엇을 해야 할 지도 가늠 할 수 없어 길을 잃은 기분이라 했었다. 이게 삶이라면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인지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했을 때 아이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매버릭을 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박은 채 매버릭이 거리낌 없이 마저 눈물을 흘렸다. 실내용 티가 온통 축축하게 젖을 때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품에 안겨 호흡이 어려움에도 끅끅대며 제 할 말 다 하던 매버릭이었다. 눈물과 콧물, 먹먹하게 삼키지 못한 침 까지 한데 섞여 알아 듣기 어려울 정도의 그 발음을 아이스는 용케도 모두 잡아 내어 들었다. 사소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한 발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다. 길고 긴 횡설수설,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는 이를 향한 사과. 그리고 그 방황의 끝에서 다시 비행을 하게 된다면 너와 함께 즐기고 싶어졌다는 말 까지. 말미에 아이스가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RIO를 할 걸 그랬다는 저도 모르게 피어오른 후회 때문이었다.

 

 

 

이렇게 너에게 모든 감정을 느낄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까지 내 모든 추억을 너로 쌓을 생각은 없었는데.

아, 아. 이렇게 내 삶의 방향을 너로 새길 줄은 몰랐는데.

그 후로 모든 작전을 매버릭과 함께 한 것은 아니었으나 때때로 아이스와 매버릭은 같은 임무에 차출되곤 했다. 아무래도 그 잘난 엘리트 집단인 탑건 스쿨의 수석, 차석 졸업자들이었다. 배정 받은 리스트를 받게 되면 제일 먼저 제 이름 보다 매버릭의 이름을 찾는 아이스가 있었고, 후에 연락을 해 보면 매버릭 역시 제 이름과 함께 찾는 것이 아이스의 이름이라고 했다. 우리 또 만나겠다. 그 말이 임무의 중 함을 잊게 하고 사람을 기대하게 했다. 이번에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그렇게 기다렸었다. 서로를.

 

 

고개를 돌려 산 처럼 쌓여있는 서류 더미를 보다 집무실을 나섰다. 모든 블라인드가 내려 가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집무실 내부를 보던 후임이 찾는 것이라도 있는지 아이스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이스의 발길이 닿은 곳은 비행 훈련장 활주로로 향하는 초입이었다. 막 훈련이 끝났는지 온통 땀에 절은 비행 수트를 펄럭이며 걸어 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내리 쬐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 반짝이는 까만 머리를 한 매버릭도 함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지나쳐 저를 향해 다가오는 아이스를 본 매버릭이 먼 거리에서부터 두 눈썹을 위로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반가움의 표시였다.

목에 힘을 주어 머리를 약간 강하게 털 때마다 땀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무래도 날이 너무 나도 더웠던 탓에 전투기 내 온도조절장치가 있어도 완벽하게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비행 수트 안에 받쳐 입은 흰 티를 붙잡고 펄럭이자 땀에 젖어 짤랑이는 소리 조차 잊은 군번줄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이내 사라졌다.

"아이스?"

"매버릭."

"왜? 무슨 일 있어?"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나랑? 나 이번엔 잘못 한 일 없는데?"

"문제가 있어야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잖아."

"그건 맞지. 우리 아이스 소령님이 하실 이야기가 뭔지 들어 나 볼까?"

 

마음은 부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여전히 제 왼손 약지에 끼워져 온통 이질감만 주는 이 반지의 영향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나가면 느껴질 시선이 있기에. 그 시선에 부담을 갖지 않도록 신념에 따라 살고자 했음에도 결국 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음을 새삼 깨달아 매버릭을 뒤에 세우곤 아이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급한 대로 오늘은 사용 할 예정이 없는 격납고 안으로 들어왔다. 해가 가득 들어오는 입구를 지나쳐 안 쪽, 적당히 어두운 곳으로 걸음을 옮기니 내려간 온도에 땀이 식어 서늘한 듯 어느 정도 마른 머리를 마지막으로 손으로 훑어 털어낸 매버릭이 아이스의 말을 기다렸다.

"훈련은 할만 해?"

"훈련? 할만 하지. 뭐, 늘 똑같은 걸."

"... 뭐, 불편한 건 없고?"

"불편? 나한테? 내가 불편할 게 뭐가 있나. 내가 불편을 만들었으면 몰라도."

차가운 공기를 깨려는 듯 짧게 웃은 매버릭이 멋쩍게 코 끝을 긁었다. 그리곤 이내 표정을 다시 굳히곤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돌리지 않아도 되니까 해. 난 상관 없어."

"..."

"왜 무섭게 침묵이야, 카잔스키."

"...미첼."

"응."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나에게 했던 좋아한단 말이 잊혀지지 않아.

격납고 안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 말에 짐짓 다물고 있던 입술이 벌어진 쪽은 매버릭이었다. 곧이어 강하게 가슴이라도 얻어맞은 것 마냥 미간을 찌푸리며 이를 깨물었다.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처음 서로를 만났을 때 보다 감정 표현이 솔직해지고 거리낌 없어졌기에 나온 모습이었다. 원래의 그라면 그저 눈만 크게 뜨고 어떻게든 감정을 숨기려 했겠지.

짧게 혀를 내어 입술을 핥은 아이스가 마저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말 한 것처럼 그 날의 말을 잊을 자신이 없다."

"...아이스."

"그럴 수도 없어. 그럴 마음도 없고. 어떡하지?"

"..."

"나에게 억누르다 말 했던 너처럼 나도 뱉으면 속이 시원해질까?"

"...내가 미안해. 내가,"

"아니. 미안하단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

"어떻게 해야 할 지 방법을 알고 싶어 널 찾아 온 거니까 사과 할 필요 없어."

침묵이 무겁게 앉았다. 진지하게 건넨 말이었기에 콧등을 잠시 구기며 코로 숨을 들이 쉬는 소리를 내었다. 이 뒤는 생각 하지 않았다. 늘 다양한 경우의 수를 대비 해 움직이는 저에게 굉장한 자부심이 있던 아이스였다. 그러나 이런 감정이 앞서는 일에서는 저도 그저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고는 침묵 위에 한숨을 먼저 얹었다. 그를 잘난 사람으로 만들었던 모든 프라이드가 매버릭 앞에선 파도 앞 모래 성 마냥 깨지고, 무너져 내렸다.

"나도 네가 좋은 데 어떡하지."

인정이 어려웠다.

깨달음은 쉬웠으나 인정이 어려웠다. 제가 여태껏 느껴왔던 모든 감정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했고, 제가 그로 인해 잘못 선택한 것이 있었다면 되돌리기 위해, 놓친 것을 위해 후회하고 노력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 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고 싶었기에.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고자 했으며, 오점 하나 남기지 않기 위해 온통 계산적으로 살아왔던 제가 이렇게 인정을 해야 했다.

 

내가 잘못 했다는 걸. 결혼은 커녕, 그 때 중장님의 제안을 기어코 거절 했어야 했었음을.

"카잔스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까만 머리의 남자가 좋다. 어떡하지? 늘 사고 치고 달려오는 사람이 왜 이리 좋을까. 때가 되면 여자를 만나야겠다며 나를 두고 떠나던 남자가 좋아서 이렇게 내 세상을 좀먹으며 고민하다 늘 최우선으로 두었던 일까지 버리고 온 내가 얼마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지 알면서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

"...톰."

"나 말 많지. 근데 줄일 수가 없네. 자제 할 수가 없어. 그 동안 하지 못 했던 말이 너무 많아서 두서없다. 그냥 내뱉어져."

"..."

"좋아. 좋아해 미첼."

"..."

"아니. 아니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굳이 따지자면 사랑 아닐까? 물음표로 끝나는 이 감정은 온점으로 끝나는 단순한 좋아함과는 다른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생각 해. 너는?"

"... 내가 실수를 했어. 그 때 너에게 그런 말을 해선 안 됐었는데."

"이미 끝난 일이야. 네가 결정한 감정이 나를 향한 애정이라면 실수라고 치부해선 안 되지."

태양이 만들은 빛이 아닌, 격납고와 활주로에 설치된 등이 밝히는 빛에 의해 처음보다 어두운 얼굴의 매버릭이 아이스 시야에 들어왔다. 갈피를 잃은 눈. 후회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 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 표현을. 입술 위로 짧게 돋은 연한 살을 씹으며 매버릭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걸 원한 게 아니었어. 이런 이야기를 원한 게 아니었다고."

"그러면?"

"나는, 나는 그냥 그렇게 이야기하고 끝날 거라 생각 했어. 나는 너보다 덜 하니까. 너보다 덜 이성적이고 아직은 어리니까 그냥 어린 치기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우리가 그 이야기로 달라질 것이 없다 생각 했어."

"지금은 뭐가 달라졌는데?"

"이런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어색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어색?"

"그래."

"어색하지 않은 건 뭔데? 응? 어색하지 않은 사이에 있는 서로의 감정은 뭔데?"

"...동료애?"

"나는 내 동료를 이렇게까지 챙기지 않아. 생각 해 보니까 그렇더라고."

안 그래?

 

매버릭이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방어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공격과 다름 없는 물음표가 다가와 꽂혔다.

매버릭은 아이스의 단호함을 좋아했다. 딱 제 선을 만들어 쳐내던 그 모습이 처음엔 무섭고 냉정해 보였으나 그 안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단단한 성미가 있기에 가능한 행동임을 알고는 그 부분을 때론 존경 했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앓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알고 있었다. 그 단호함이 어느 순간 녹아내렸음을. 그 누구도 아닌 매버릭 자신에게. 다정한 눈빛으로 제 장난에 장단 맞춰 웃어 줄 때면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어차피 별 것 아닌, 조금 치열한 여름을 보냈던 사이 외에 정의 할 무엇도 없었으면서.

 

그리고 그 단호함이 다시 벽을 세웠다. 처음과는 다르게. 매버릭을 밖에 세워둔 채 세웠던 벽이 아니라, 매버릭을 안에 둔 채로 사방에 벽을 세웠다. 아이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놓을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이 눈빛은. 자신의 실수를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때의 상황을 모르는 척 재차 되묻던 때처럼 솔직한 감정을 종용했다.

 

하지만 이건 그럴 수 없어. 그래서도 안 되는 거고.

"나는.., 너는.. 결혼 했잖아."

"그래서?"

"나는... 내가 망쳐버린 사랑이 있어서 못 해. 그런 너랑 아무 것도."

"...매버릭."

"내가 얼마나 구스와 캐롤을 사랑했는지 알잖아. 그리고 그 결혼 생활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그런데 내가 너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해? 겨우 누르고 참았던 것을 내뱉은 내가 잘못이야. 내 실수의 각오는 너랑 차라리 멀어지겠다는 거라고. 그래. 그게 나아. 여기서 얼마나 더 솔직해 지길 원하는 거야? 뭘 원해?"

"..."

"내가 뭘 더 망가뜨려야 할까...."

 

오늘은 밤 비행 훈련이 없다. 모든 격납고를 확인하고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와 이만 먼저 가 보겠다며 말을 마친 매버릭이 옆 테이블에 대충 놓았던 헬멧을 집어 안았다.

먼저 등을 보인 채 떠나는 등에 아이스가 물었다.

"그러면 아직, 너는 내가 좋다는 거지?"

"...그만 해. 그만 하자. 말 하고 싶지 않아."

"그것만 대답 해. 그러면 더 이상 오늘은 붙잡지 않을게."

 

걸음을 멈춘 매버릭이 고개를 돌려 아이스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그리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미약한 높낮이였기에 어쩌면 확인이 불가능 할 수준으로. 끄덕였다고 보고 싶은 아이스의 마음이 보여준 환영처럼.

 

입안이 썼다.

 

매버릭은 아이스를 피해다녔다. 아니, 솔직히 후임이 상관을 피해 다닐 방법은 없었기에 계속 해 맞 부딪혀 오는 아이스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대화를 이어가고자 하지 않았다. 깍듯하게 sir 까지 붙여 대화 할 마음이 없음을 피력하는 매버릭에게 아이스는 매버릭의 생각보다 조금 더 순순히 막았던 길을 터 주곤 했다. 평소 장난을 칠 때에도 늘 매버릭의 모든 말을 부드럽게 받아 주긴 했으나 가끔은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아세우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예상보다 유한 태도를 보일 때면 매버릭은 당황했다. 투명하게 보여주는 듯 하면서도 안개가 낀 듯 속내를 도저히 종 잡을 수 없는 남자. 그게 매버릭이 정의하는 아이스였다.

 

시간이 흐르며 비행 훈련 일지 작성 마감이 다가옴에 매버릭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늘 간결하게 쓰던 보고서였음에도 하얀 화면만 보면 막막 해 져 오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추가 업무를 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추가 근무를 통해 근무 수당을 더욱 받을 바엔 차라리 돈을 덜 쓰고 추가 근무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의 그에게서는 평소 하루 끝에 보는 하늘 보다 더 짙은 창밖에 탈출하고픈 마음만 가득했다. 해야 하는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온통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주변에 드문 드문 아직 처리할 일이 남아 있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른 동료들도 있었기에 어색함이나 큰 적막감은 없었으나 머리가 답답했다. 문득 아이스가 퇴근 했는지도 궁금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려 하니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사실 몸을 혹사시키지 않으니 애써 치워두려 했던 고민거리가 계속 해 고개를 들은 것이다. 아이스. 아이스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결혼 축하한다는 말과 자기가 먼저 소령을 달았다면 신랑이 바뀔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지 않냐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건네는 저에게 웃으며 그랬어도 오늘 처럼 활짝 웃으며 기대했을 것 같다던 신부 아니, 이제는 아내와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진 않을 지. 실컷 만들어 둔 핫초코도 속이 느끼해 질 정도로 차게 식어 식욕을 잃은 매버릭이 책상 위 모든 것을 살짝 앞으로 밀어 버리며 생긴 공간에 이마를 댔다. 아무 행동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막막했다. 정답이 없는 걸 알면서도 정답을 내고 싶었다. 무엇에 대한 정답을 내고 싶은 지 그 목표 자체도 설정하려 들지 않아 놓고.

 

"지금 자면 언제 집에 가게?"

 

불쑥 들려온 목소리는 아이스 것이었다. 전기에 감전 된 것 처럼 고개를 들어 보니 눈동자를 내리 깔며 쳐다보는 아이스가 서 있었다. 조용히 올 수 없는 바닥재와 군화인데 아무래도 제가 졸긴 했나 보다. 어색하게 광대 근처를 살살 긁던 매버릭이 이거만 하고 가려고. 라며 하얀 화면을 보여 주었다. 아무것도 안 썼는데? 그 말에 매버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이것만 어떻게든 쓰고 가려고... 말 끝이 흐려졌다. 제가 뱉으면서도 오늘 안에 못 쓸 것이 확실 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의자를 끌어와 매버릭 옆에 앉은 아이스가 다리를 꼬곤 턱을 괬다. 매버릭이 물었다. 집에 안 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뭐?"

"너 일하는 거 보기."

"그게 일이야?"

"후임이 무슨 일 하는지 가끔은 상관 된 입장에서 봐주긴 해야지. 어서 써."

혼자 있을 때에도 안 적히던 것이 누가 있는다고 더 잘 적힐까. 오히려 반이나 더 줄어 들은 의욕과 집중력에 매버릭이 하릴없이 우선 하라는 대로 아무 단어나 눌렀다가 지우기를 반복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이스가 작게 목을 가다듬었다.

 

"일 하기 싫으면 대화나 하자."

"지금 근무 중 인데요, 소령님."

"선임과의 대화 시간이라 생각 해."

"그게 무슨,"

"원래 이런 게 중요 한 거야."

자. 나 봐.

매버릭의 의자를 잡아다 돌린 아이스가 저를 향한 매버릭의 시선에 웃었다. 얼마만에 눈을 마주하는 건지. 매번 아이스를 피하며 눈을 마주치려 들지 않았던 매버릭이기에 아이스는 이 순간,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일 하기 싫음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매버릭의 얼굴은 언제 봐도 아이스의 눈에 알맞았다. 적당히 동그랗고, 적당히 각졌으며, 적당히 날카롭고, 적당히 순둥 해 보였으며 하늘을 가장 사랑하는 초록빛 들판 처럼 총기로 빛나는 눈동자에 제가 담겼을 땐 마치 풀밭에 자라 오로지 태양만을 사랑하며 쫓는 사람을 가로채는 느낌이 들게 했다. 커다란 눈동자에 제가 담긴지 몇 초나 되었을 까. 아니나 다를까 대화를 거부하며 이만 먼저 가겠다는 매버릭의 손목을 힘 주어 잡아 저지하는 아이스였다.

"나는 할 말 있어."

"꼭 해야 해?"

"꼭."

"..."

더 이상 피할 길이 없다. 어쨌거나 보는 눈도 있으며, 여기서 큰 소리가 나왔을 때 저 뿐만 아니라 아이스에게도 커다란 리스크가 될 것이기에. 매버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다만 아이스의 눈을 마주하진 못 했다. 부끄러웠다. 그 회색의 눈동자에 제가 담기는 것이. 쑥스러웠다. 편하게 담기고자 했던 그 공간에 제가 들어가는 것 자체가. 혹시라도 못나 보이진 않을까, 그가 말 했던 감정이 조금이라도 사그라 들거나 후회하진 않을까.

 

"나는 여전히 네가 사랑스러워."

"나는 몰라."

"이혼할까?"

"너 결혼한지 얼마 안 됐어. 이성적으로 생각 해."

"이성적으로 생각 해서 널 사랑하니까 빨리 그 사람을 놔주는게 맞지 않아?"

"착각 하는 거야. 네가. 그냥 사랑이라고 생각 해서."

"그러는 너도 착각이야?"

"..."

"날 좋아한다는 그 마음. 착각이야? 솔직하게 말 해 봐."

"톰."

"그렇게 싫으면 착각이라고 말 해."

그래도 뭐, 그게 착각이 아님을 깨달을 때 까지 내가 쫓아 다닐 거지만.

아이스가 웅얼거렸다.

의자 팔걸이에 얹어진 매버릭 손 위로 아이스의 이마가 닿았다. 보통 사람 보다 조금은 서늘한 체온의 살갗이 닿아왔다.

 

"아니라면 차라리... 차라리 내게 말 해줘. 그냥 다 내 탓이라고. 내가 잘못 했다고."

"..."

"내가 놓을 수 있게."

"..."

"네가 먼저 내게 이야기 했던 그 감정의 시작도 내 잘못이라고. 다 나한테 화살을 돌려. 너는 죄가 없다고 해."

"아이스."

 

삐걱이며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앉아있던 대위 하나가 자리를 정리하곤 먼저 가 보겠다며 매버릭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스에게 잡힌 손이 아닌 반대 손으로 대충 휘저어 인사 한 매버릭이 어색하게 공중에 떠 있는 손으로 아이스의 고슴도치 같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었다.

 

탓하라고 한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제가 도망 다니는 모든 순간 아이스가 어떤 생각으로 앞을 막았었는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은 매버릭이었다. 다짜고짜 잡고, 잡힐 때 마다 고백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로 돌아가지 못 하더라도, 얼굴은 마주 볼 수 있잖아. 눈은 마주칠 수 있는 거잖아. 순종하듯 매버릭의 손길에 따라 작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던 아이스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 이마를 댔을 때 보다 체온이 올라간 듯 손등이 따뜻해졌다. 

 

"좋아해. 사랑해. 다 지난 것 같은 너의 애정에 매달리는 내가 억울 할 만큼. 정말 몰랐던 거야? 너의 끝이 나에겐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걸."

"..."

"뭘 해 주면 날 사랑해 줄 거니. 아니, 좋아 만이라도 해줘. "

"..."

"네 말 한 마디면 모든 걸 내려 놓을 수 있는데. 차라리 지금이니까 놓을 수 있는 거야."

"후회 할 거야."

"그건 내가 하는 거니까 네가 상관 할 바가 아니야."

"나를 만난 것도."

"그건 내 선택지에 없는 거야."

"네 명예도, 미래도, 입지도 모두 무너지는 순간이 오겠지."

"그런 것 따윈 내게 하나도 필요 없는 거야."

"...날 원망 할 거야."

"미첼."

아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엎드렸던 터라 피가 몰렸던 것인지 아이스의 얼굴이 붉어지긴 했다. 못마땅한 듯 눈매를 좁히며 매버릭을 흘기던 아이스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이 상황에서 할 이야긴 아닌데 자기 비하는 하지 말아줘. 아. 거절도."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

"좋아한다고 해. '나도' 라고 답 하면 되는 거야."

 

우리 꼴통. 독불장군. 어려운 길만 가려고 하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짓는 아이스에게 이내 웃음이 터진 매버릭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매버릭의 눈매가 부드러워 졌다. 이를 감지한 아이스 역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끝으로 갈 수록 가늘어지는 그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가볍고, 당당했다.

"나 꼴통이라 네가 나 버리려 해도 안 버려 질 거야."

"또 말이 길어지네 우리 미첼."

"나 버리려 들면 질척일거고, 전투기에서 갑자기 뛰어내린다 할 거야."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낙하산을 채워줘야겠다."

"나 버릴 생각은 했어?"

"아니. 그냥 네가 스릴있다고 좋아 할 것 같아서 하는 생각이야."

 

무릎으로 책상 다리를 두들기던 매버릭이 가장 깊은 한숨과 함께 심연에 묻어 두었던 말을 마지막으로 꺼냈다.

 

"내가 널 정말 망쳐버린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 까."

"그런 생각을 왜 해."

"나는 그렇다 쳐도 늘 밝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살아야 하는 너에게 내가 큰 오점을 주는 건 아닌지..."

"나는 어두워도 잘 다녀."

"그게 아니잖아."

"다를 게 뭐야. 그리고 네가 없는 곳의 세상 보단 차라리 나락으로 내리 꽂혀도 너랑 함께 하는 곳이 나아. 그게 내가 있을 곳이고."

"..."

"너랑 말 하지 못하던 모든 시간이 숨도 못 쉴 만큼 답답하더라고. 어떡해."

"...뭘."

"좋아한다면서 그 대가로 내 목숨 줄을 가져가 버리네."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얼마나?"

"사랑스러워 미칠 만큼."

내가 더 강해질게.

마지막 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고, 이건 아이스 본인 스스로가 해야 하는 각오와 다름 없는 말이었으니까. 결국 한 글자도 쓰지 못 한 보고서를 그대로 접고 이만 퇴근 하자며 내밀어진 손이 있었다. 매버릭이 그 손을 잡으며 커다란 눈으로 아이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 속 뜻을 간파한 아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네 일이니까 보고서는 네가 써야 해. 쳇. 이래서 눈치 빠른 수석은 안 된다니 까. 작게 궁시렁 대던 매버릭이 아이스의 해사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톡, 쳤다. 아직 젊은 나이에, 마음만 먹으면 가야 할 길은 많고, 넓으며 아이스의 성격을 미루어 볼 때 원한다면 어디든 그 정점에 다다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시작이 이 반지였고. 앞으로의 난관이 없다고 차마 아이스 역시도 단정 짓지 못 할 것이다.

 

건물을 나섰다. 웃을 때를 제외하고는 속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회색의 눈동자가 까만 밤 하늘을 담았다. 주홍 빛 등과 달, 별이 쏟아지는 새까만 하늘이 막연히 아름다웠다.

 

온통 어둠 뿐인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분명 그 안에 아름다운 것도 있을 것이다.

어두운 밤 하늘을 낭만적으로 만들어내는 머나먼 위치의 별, 달 그리고 그들과 반대로 먼 곳의 인위적인 가로등, 조명 처럼 굳이 찾거나 억지로 밝혀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닌 그 존재 만으로도 아이스만을 위해 빛날 아름다운 것.

저보다 작은 손을 꼭 쥐며 아이스가 웃었다. 배 안 고파? 나 너랑 대화 하고 싶어서 신경 쓰느라 요 며칠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 했어. 쓰러질 것 같아.

"배고파. 초콜릿 먹고 싶어."

"이 시간에?"

"원래 맛있는 건 시간을 따지지 않아."

귀엽기는.

 

아이스만을 위한 반짝임이 옆에서 제 빛을 발했다. 

 

"그런데 왜 굳이 네 탓으로 돌리려고 했던 거야? 내 고백이었는데."

 

마땅히 열린 가게가 없어 24시간 영업하는 패스트푸드점에 자리를 잡은 아이스와 매버릭이 마주보고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벽에 설치 된 오래된 TV에서는 하루를 마감하는 나이트라인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작은 소리에 굳이 시선을 주어 자막을 보지 않으면 정확한 내용을 듣기 어려울 정도로 화질이 고약해 그저 화면있는 라디오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매버릭이 물었다. 콜라를 커피로 바꿨던 아이스가 제 몫의 커피를 마시곤 별 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내 탓으로 돌리면 처음 사랑의 시작도 내가 되잖아. 그러면 '먼저'를 빼앗긴 네가 아니라고 반박 할 걸 예상해서 일부러 그랬어."

 

제 성격을 제대로 간파한 아이스의 한 수에 할 말을 잃은 매버릭이 아이스의 감자튀김 위로 온통 케첩을 뿌렸다. 별다른 소스를 찍어 먹지 않는 스타일의 아이스가 아이처럼 '바보야!'라며 당황했다. 속에 파묻혀 겨우 케첩 공격에서 살아남은 작은 감자튀김을 꺼낸 아이스가 그래도 뿌듯하단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도 좋잖아."

"아닌데. 나는 너 싫어."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는 네가 좋아."

"그러면... 방법이 없네.."

"어떤 방법?"

콜라가 비워지며 텅 빈 소리를 냈다. 입 안의 음식물을 모두 꼭꼭 씹어 삼킨 매버릭이 가슴을 내밀며 숨을 크게 쉬었다. 아이스가 매버릭의 대답을 마저 기다렸다.

 

"나도 네가 좋아."

더 이상 아이스의 말이 얹어지지 않았다. 처음과 끝, 기념할 만한 것은 모두 매버릭에게 주고 싶어서. 그저 시간에 맞지 않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어둑한 창 밖으로 가게 내부가 온전히 반사되었다. 사방을 둘러 보아도 온통 매버릭이 보이는 시야. 사랑이 제 곁에 비로소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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