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틴 - 카잔스키의 불멸
1.
얼음이 깨지는 소리는 마치 총성 같았다. 쩌적쩌적 갈라지며 얼음판이 입을 벌린다. 물속으로 푹 가라앉은 몸. 순간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열린 입과 목으로 찬물이 울컥울컥 밀고 들어왔다. 온몸이 냉기와 아픔으로 쥐어짜진다. 뽀글뽀글 소리를 내며 공기 방울이 마구 흘러나왔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겨우내 함께 언 낙엽이며 나뭇가지들이 떠다닌다. 물 속으로 처박혔다 푹 솟아오른 작은 몸뚱이의 뒷덜미를 낚아챈 건 근처에 있던 낚시꾼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모여든 사람들 틈에서 카잔스키는 생각했다. 카잔스키는 이런 걸로 죽지 않아. 톰 카잔스키는 고작 다섯 살을 먹었고,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다. 죽음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뭐야. 그래서 아이스맨이 됐다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직 콜싸인이 뭔지도 몰랐을 때야."
"아이스맨이 아이스맨이 된 건 겨울 훈련 때 물에 빠져서지."
어린 시절 죽을 뻔했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매버릭과 구스가 인상을 구겼다. 갑자기 끼어든 사과의 의미로 슬라이더가 큰 손 가득 쥔 맥주병 몇 개를 흔들었다. 낚아챈 구스가 주변에 병을 돌린다. 아직 제 몫을 반도 마시지 못한 매버릭이 입구를 우물우물 빨았다. 입술에 작은 거품이 묻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계절의 구보 훈련 때였다. 이거 징계 아니냐고 투덜거리는 슬라이더 옆에서 아이스맨은 묵묵했다. 갓 임관한 장교들을 놀리고 싶던 중위 하나가 눈이 내려앉은 언 호수 위로 잭나이프를 던졌다. 열외 없이 모두가 뛰어들어야 했고, 나이프를 찾은 것과 동시에 미끄러진 톰 카잔스키가 반쯤 녹은 얼음 사이로 빠진 건 그다음이었다. 어린 시절과 달리 반쯤은 스스로 기어나왔지만 반쯤은 동기들이 달라붙어 꺼내야 했다. 그는 아이스맨이라는 콜싸인을 얻었고 상관은 징계를 받았다. 한 번도 힘든 경험을 두 번이나 한 그런 이야기다. 얼른 듣기에만 멋있는 아이스맨. 그런 이름을 얻는 건 어쩌면 운명일지 모른다며 슬라이더는 낄낄 웃었다.
"그 나이프 아직도 있어. 기념이지."
"네 콜싸인 이야기는 생각보다 흥미롭다. 안 죽었다는 부분이 가장 흥미롭고."
"난 안 죽어."
어느새 모두가 흩어진 틈에서 눈을 끔벅거리고 앉은 건 매버릭 혼자였다. 아직도 다 마시지 못한 맥주병을 우물거리면서. 군인이란 직업은 무엇보다 죽음에 맞닿아 있다. 확신에 찬 그 말투에 매버릭이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반박을 하고 싶은지 살짝 열렸던 입술이 꾹 다물어진다.
"야. 안 죽는 사람이 어딨어."
"난 안 죽어."
"진짜 개소리한다."
아무래도 넌 프로이트의 발달 단계에서 아직 구강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며 말을 붙이려던 아이스맨이 멈칫했다. 매버릭은 여전히 입을 비죽 내민 채 병만 문 채다. 눈만 마주치면 왁왁 싸워대던 초반과 다르게 이제야 좀 대화다운 대화를 하게 됐는데. 뭐가 신경을 건드렸는지 부루퉁한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 두 분이 다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지. 큰 실수를 했다. 간다며 몸을 일으키는 매버릭의 팔을 잡은 아이스맨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애초에 죽지 않는단 말도 술에 취한 게 아니라면 하지도 않았을 말이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라는 듯 쳐다보는 녹색 눈이 빛에 반들거렸다.
"저, 그…"
"뭐야. 빨리 말해. 나 구스한테 가야 돼."
"카잔스키는 불멸하거든."
너만 알고 있으라는 말을 덧붙일 것도 없었다. 휘둥그레 뜬 눈의 동공이 어이없다는 듯 크게 커진다. 곧 끔벅거리던 눈이 가늘게 감겼다. 혀를 찬 매버릭이 손을 들어 아이스맨의 이마를 짚었다. 취기에 열 오른 얼굴로 닿는 손이 적당히 서늘했다.
"와… 취했구나."
"아니, 그게… 들어봐, 매버릭."
"슬라이더! 얘 완전히 맛 갔어!"
주크박스가 뱉는 시끄러운 기타 소리를 뚫고 매버릭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하나 남은 큐대를 두고 구스와 실랑이를 벌이던 슬라이더가 후다닥 달려온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다. 취한 게 아니라고,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아이스맨의 말은 가버리는 매버릭의 뒤통수에 가 닿지도 못했다. 미련 하나 없어 보이는 작고 검은 머리통. 슬라이더는 그를 짐짝처럼 업었다. 멀쩡히 걸어갈 수 있다는 말은 듣지도 않았다.
"또 그 개소리 했냐?"
"아니, 진짜. 매버릭 불러. 설명할 수 있다고."
"그런 걸 왜 매버릭한테 말해. 나도 안 믿는 거. 너 그 얘기 할 때마다 되게 멍청해 보이는 거 알지?"
모르겠다. 왜 매버릭한테 말했는지. 아이스맨이 입을 다물었다. 휘적대는 긴 팔다리를 무시하는 슬라이더의 발걸음이 호쾌하다. 매버릭이, 취한 동료들이, 노랫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아이스맨이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긁었다. '진짜 제대로 된' 첫인상은 완전히 망했다. 매버릭의 서늘한 손이 닿았던 이마의 온도만이 갑자기 불처럼 뜨거웠다.
2.
톰 카잔스키가 저택 안에서 몰래 자전거를 타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날 아버지는 껄껄 웃어댔다. 발목이 골절돼 꼼짝도 못하는 어린 아들을 앞에 둔 채로. 어머니가 짐짓 그만하라는 듯 팔을 몇 대 때리고 나서야 웃음은 멈췄다. 슬그머니 약은 올랐으나 소리 내 웃는 아버지의 모습은 신기했다. 그는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면 안 된다고 배운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처음 듣는 그 웃음소리는 호탕했다.
- 목이 부러질 뻔했지.
- 하지만 안 부러졌어요.
- 카잔스키라 그래.
어머니가 두고 간 쿠키를 씹으며 카잔스키는 시큰둥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준 음식을 남기는 걸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어린 주제에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예외는 없었다. 달다 못해 쓰게 느껴지는 초코칩이 이에 달라붙는다. 우유로 간신히 입을 씻었다. 우유조차 단맛이 났다.
모든 카잔스키는 불멸을 선고받는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은 그것을 믿었고, 다가오는 죽음에 어리둥절해했다. 아무도 기억조차 못할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카잔스키가 자꾸만 다가오는 죽음의 이유를 찾았다.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카잔스키는 결국 죽는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이후의 카잔스키들은 그것을 믿었고, 다가오는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카잔스키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선고받은 불멸만큼이나 강력한 운명이었다. 영원히 되풀이되는 굴레였다. 그러한 이유로 넌 목이 부러지지 않았고, 나 역시 언젠가 죽게 될 것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어린 톰 카잔스키는 눈을 끔벅였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불멸할 것이다. 그런데, 불멸이 뭐더라.
"네 그 이야기는 정말로 들을수록 흥미롭다. 개소리라는 점이 가장…"
"그런데 진짜야."
"넌 절대 안 할 말 같아서 더 웃겨."
천하의 아이스맨이 개소리나 하고 있다니. 매버릭이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때마다 어깨 위 자국이 함께 오르내린다. 천하의 아이스맨과 그 매버릭이 틈만 나면 침대에서 뒹구는 사이라는 건 웃기지 않은 이야기인가. 아이스맨의 생각에, 그것이야말로 가장 웃기는 이야기였다.
떠다 준 물을 단숨에 들이켠 매버릭이 침대에 웅크리고 눕는다. 항모의 삐걱거리는 이층 침대나 관사의 작은 침대, 파병이나 훈련 중에 간신히 얻는 모포 안에서 팔다리를 구기고 자는 것에는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간만에 배에서 내린 참이다. 둘은 샌디에이고에서 출항한 두 척의 배에 올라탔다. 바다를 배회하는 거대한 섬. 그건 각각 지구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전쟁의 모래를 매단 채 간신히 돌아왔다. 만난 건 자그마치 일 년 만이었다. 아이스맨이 제법 신경을 써서 고른 호텔 침대는 크고 안락하다. 그러나 매버릭은 늘 저렇게 누웠고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다. 옹송그린 몸을 끌어안은 아이스맨이 한숨을 내쉬었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을 때마다 서걱서걱한 바다와 모래 냄새가 났다. 매버릭이 늘 달고 다니는 죽음의 냄새. 불멸하는 카잔스키에겐 어울리지 않는 냄새였다.
"그래도 부럽다."
"안 믿는다면서 부러워?"
"안 믿어, 멍청아. 그냥 그 믿음이 부러운 거지. 죽는 건… 무섭잖아. 슬프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잃고, 동료들을 잃고, 스스로 만든 가족이었던 구스마저 죽기 직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로 매버릭은 이 주제에 민감했다. 지금의 구스는 지상직으로 일했다. 얼른 보기에 다리를 약간 절긴 했으나 그는 파병이며 출항을 갔다 돌아오는 매버릭을 늘 시원한 웃음으로 맞았다. 함께 맥주를 마시며 어린 구스의 아들에게 입맞춤을 퍼부어대는 매버릭. 그러나 사실은 그가 매번 울며 돌아온다는 걸 아이스맨이 알아차린 게 썩 오래되진 않았다. 그건 같은 항모를 타기 직전, 탑건의 졸업이 있고 자그마치 몇 년 만의 일이었다. 구스의 일은 건너건너 듣긴 했다. 그렇지만 윙맨에게 연락도 안 하고 살았느냐는 아이스맨의 농담에 그저 툭툭 어깨를 치던 매버릭의 눈엔 어딘가 체념이 있었다. 반드시 다가오는 일에 대한 공포, 거스를 수 없는 필연적인 죽음.
- 카잔스키는 진짜 안 죽어?
-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뭐, 진짜 안 죽겠어? 그냥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농담 같은 거지. 아버지는 꽤 진지하셨던 것 같지만.
젊은 대위가 몰던 전투기 하나가 제대로 훅을 걸지 못해 갑판 위에서 부서졌던 날, 아이스맨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선잠을 깼다. 함께 선실을 쓰는 소령은 깊게 잠들어 있었다. 늦은 밤에 실례합니다, sir. 짧은 경례를 마치기도 전 들이닥친 매버릭의 물음에 아이스맨은 눈만 깜박거렸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목소리는 절박했다.
- 멍청아. 이럴 땐 안 죽는다고 해야지…
충혈된 눈이 붉고 푸르게 빛을 품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던 아이스맨이 아, 혀를 찼다. 매버릭에게 지금 필요한 답은 따로 있다. 생긴 거랑 다르게 멍청한 소리를 한다며 늘 핀잔을 주던 그 이야기가 지금의 그에겐 간절했다.
- 그럼. 대외용 이야기야. 카잔스키는 안 죽어.
- 그치? 카잔스키는 안 죽지?
- 당연하지. 영생할 거야.
소령이 코 고는 소리가 드릉드릉 울린다. 까치발을 세워 아이스맨의 어깨 너머를 힐끔 본 매버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채 마르지 않은 검은 머리칼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기껏해야 군에서 나누어주는 싸구려 보급 샴푸인데도 향기가 새삼 아찔했다. 자다 나와 온통 구겨진 아이스맨의 티셔츠 주름을 만지작대는 매버릭의 손은 스스로 벗겨낸 상처투성이였다. 그것에 눈썹을 치켜올리기도 전에 애처로운 물음이 닿는다.
- 죽으면 안 돼, 카잔스키.
- 믿어. 안 죽는다니까.
- 죽을 뻔해도 안 돼. 전투기도 안전하게 몰고, 어디 갈 때도 차 조심해야 해. 알지? 총에 맞아도 안 돼.
이렇게 손톱을 물다니 아직도 구강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농담을 할 것도 없었다. 다시 방 안을 힐끔거린 매버릭이 작게 속삭였다.
- 항모에서 무사히 내리면 우리 자자.
뭉툭하게 짧아져 피가 밴 손톱과 긴장한 얼굴을 번갈아 보던 아이스맨이 어깨를 으쓱했다.
- 그건 안 내려도 할 수 있어, 미첼.
그게 몇 년 전 이야기다. 죽지 말라고, 그러니까 전투기도 안전히 몰고 차도 조심하고 총도 맞지 말라던 매버릭은 스스로가 한 말은 잘 지키지 않는다. 아무래도 착륙하다 잠깐 딴생각을 한 모양이라며 삐걱거리는 다리를 한 채 매버릭은 멋쩍게 웃었다. 구스가 난리였을 걸 알았기에 아이스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매버릭이 딴생각을 했다고? 말도 안 되지. '시야 확보를 못 한 동료 기체를 엄호하다 반파 발생'. 둘은 이제 계급 차이가 좀 났다. 매버릭의 변명보다 볼 수 있는 몇 줄의 서류가 늘 진실에 가깝다. 아플 때는 전투기를 몰 수 없기에 땅에 내려온 매버릭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당분간의 서류 정리였다. 아마도 혼자서.
얼룩진 매버릭의 살갗을 매만지며 아이스맨이 눈을 감았다. 반 정도는 비행이 만든 상처, 반 정도는 제 입이 물고 빤 자국들. 볼 때마다 구강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놀려댔지만, 참지 못하고 입질을 하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이 있으면 함께 유치해지고 휘말리는 건 매버릭이 만들어내는 재난이다. 그걸 생각하면 심장이 불툭 튀었다.
"매버릭, 자?"
"일어나야지…"
"주말에 우리 집 갈래? 별로 안 멀어. 너 한 번도 안 와봤잖아."
팔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매버릭이 돌아눕는다. 벗은 가슴을 매만지는 작은 손에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취해서 개소리를 하는 게 틀림없다며, 처음 이마를 매만지던 그날처럼 손은 다소 서늘했다.
"…모르겠어. 브래들리가 삼촌 기다릴 텐데."
"그 다음 주도 괜찮아."
매버릭이 웃었다. 손바닥이 닿는 그 얇은 살갗 너머로 심장이 튀어 나가진 않을까 아이스맨은 순간 걱정했다. 부정맥은 조종사에게 치명적이다. 카잔스키가 아무리 죽지 않는다지만 정기적인 검진은 늘 필요했다. 카잔스키의 불멸.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타인의 죽음에 늘 겁을 먹는 품 안의 꼴통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하니까.
3.
"죽은 사람들이야."
"그렇겠지."
"사랑에 빠져 불멸에 실패한 카잔스키지."
복도에 걸린 초상화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전형적인 러시아식이다. 천천히 걷던 매버릭이 어느 한 그림 앞에 멈추어 섰다. 톰 카잔스키와 비슷하다. 찬란한 금발, 차가운 청회색의 눈동자. 뒤따라온 아이스맨이 홀린 듯 올려다보는 매버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굳이 묻진 않았으나 대답은 친절했다. 죽은 사람들, 불멸에 실패한 카잔스키.
카잔스키 저택의 위용 앞에 기가 죽은 매버릭은 들고 온 와인을 뒤로 숨겼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함께 가 고른 빈티지 와인이었다. 아버지는 드라이한 걸 선호했지만 그런 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우리 집의 모든 건 어머니에게 맞춰야 한다고, 꽃향기가 난다는 가벼운 와인들 사이에서 아이스맨은 골몰했다. 사랑에 빠져 죽게 될 가장 가까운 카잔스키는 아버지다. 톰 카잔스키는 그 증거이자 산물이었다. 아버지가 장난처럼 제게 털어놓은 이야기를 어머니는 알고 있을지, 아니면 그저 농담으로 치부했을지가 문득 궁금했다.
"그럼 너도 곧 초상화 그리는 거야? 사진도 아니고 초상화라니 너무 이상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님은 아무래도 매버릭이 오기 전 돌아갈 심산이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타임라인은 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제독의 아들, 그리고 얼어붙은 친구의 경례를 가볍게 받은 이는 몇 번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의원이래, 주전부리가 든 쟁반을 들고 들어온 아이스맨이 여상히 대답하며 던져놓은 매버릭의 점퍼를 옷걸이에 걸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채 그는 여전히 초상화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긴, 딱 한 번 집에 들른 적이 있던 슬라이더도 그랬다.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괴상한 몰골이긴 하다고 아이스맨은 생각했다.
"내가 왜? 죽어야 걸린다니까."
"결혼할 거잖아."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생략에 아이스맨이 인상을 찌푸렸다. 결혼한다는 건 사랑에 빠진다는 거고, 사랑에 빠지는 카잔스키는 죽고, 죽으면 초상화가 걸리고… 한 말들을 개소리로 치부한 사람치고는 어느 부분은 꽤 믿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하긴 말이란 게 그렇다. 진실이든 아니든, 일단 듣고 나면 신발 속 모래알처럼 뇌 구석을 굴러다닌다. 그렇지만 결혼한다는 말이 곧 사랑에 빠진다는 말이라 믿고 있는 그 순진함은 재미있었다.
"예뻐?"
"저녁 먹어야 하니까 너무 많이 먹지 마… 모르겠어. 한 번 봤거든."
"한 번 봐도 예쁜 건 예쁜 거야."
크게 베어 문 에그타르트 가루가 입가에 묻었다. 맥주 거품이 묻어있던 날처럼 매버릭은 변한 것이 없었다. 손을 뻗어 털어내자 혀를 내 끝을 핥은 그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우두커니 서 있던 아이스맨이 와락 덤벼들자 당황한 손이 어깨를 때려댔다. 곧 침대 위에서 몸이 바르작 엉켰다. 항모나 관사나, 하다못해 호텔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크고 푹신한 침대는 그 와중에도 스프링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응접실이 아니라 침실로 쪼르르 구경하러 들어간 게, 반쯤은 너도 생각이 있는 게 아니었느냔 말에 억울한 듯 다시 어깨를 치던 손이 곧 잠잠해졌다. 크게 뜬 녹색 눈이 높은 천장을 본다. 어울리지 않게 갖춰 입은 셔츠 아래 목덜미를 빨던 아이스맨이 고개를 틀었다. 따라간 시선에 보이는 건 조명 말곤 아무것도 없다.
"초상화가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어…"
이 꼴을 지켜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죽은 톰 카잔스키가 없어서인지. 어느 뜻인진 몰라도 다리 사이로 열이 올랐다. 꽉 끌어안은 몸이 뜨거웠다.
부모님이 노골적인 초대장을 받은 지는 좀 됐다. 그 카잔스키에서 대를 이은 제독이 나올 것 같다는 분위기가 만들어낸 결혼의 야망. 아이스맨이 내켜 하지 않는 걸 알았기에 기회는 신중했다. 어머니가 고르고 고른 상원의원의 딸과는 몇 주 전 딱 한 번 얼굴을 봤다. 밝은 금발을 한 침착한 사람이었다. 매버릭과 닮은 건 작고 아름답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한 번 봐도 예쁜 건 예쁜 거란 매버릭의 말은 어느 정도는 옳다. 매버릭을 처음 본 순간 떠올린 생각도 그거였으니까.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동안 내내 생각했던 건 한 가지였다. 아무런 감흥도 떨림도 두근거림도 없으니 아마도… 나는 영생할 거라고.
"너 약혼하면 이 짓 안 할 거니까 봐주는 거다, 진짜. 제독님한테 걸리면 난 바로 제대야."
중얼거린 매버릭이 다리 사이로 손을 뻗는다. 대답 대신 얼굴 이곳저곳 정신없이 입을 맞추는 입술에 그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처럼 청량하게 터지는 소리. 그러나 아이스맨은 따라 웃지 못했다. 아, 그 웃음에 다시 또 심장이 벌컥 튀었다.
4.
웅크리고 돌아눕는 등은 여전하다. 심지어 제 방의 침대에서도 그랬던 매버릭은 지금 병원 침대에서 등을 보이고 누운 채다. 옆으로 누우면 안 된다며 어깨를 툭툭 치는 간호사의 손길에 그가 보채는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친다.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계속 보고 있자니 약간 졸음이 왔다. 조종사 특유의 멍든 몸이 가벼운 환자복 사이로 울긋불긋하다. 바싹 마른 입술에 껍질이 일어나 있다. 훈련 중 있었던 G-LOC. 다행히 추락 전 깨어나긴 했으나 평소의 매버릭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았다는 부제는 아이스맨을 신경 쓰이게 했다. 같은 부대에 배치된 건 처음이다. 근 일 년 만에 얼굴을 봤다.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하고 포옹을 했던 게 며칠 전이다.
- 우와, 오랜만이네, 윙맨.
- 그러게. 너 대체 저번 부대에서…
- 에이. 좋은 분위기 흐리지 말자. 어때, 사랑에 좀 빠졌어? 불멸해?
장난스럽게 찡긋거리던 눈은 지금 꼭 감긴 채 속눈썹을 파닥거린다. 물을 게 많다는 걸 알면서도 피하려는 속내가 빤해 이번에도 아이스맨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묻는다면 해줄 말이 많았다. 그렇지만 굳이 이야기하기엔 왠지 미련에 멋쩍은 이야기였다. 사랑에 빠졌어? 이 말에 숨겨진 의미는 많았으나 말하고자 하는 건 한 가지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
카잔스키 저택에서 함께 한 식사는 사실 잘 생각나지 않는다. 스페인식 마늘 수프와 오리 콩테를 메인으로 먹었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얹은 브라우니가 나왔다는 것만 생각났다. 어머니는 매버릭이 사 들고 온 와인을 마음에 들어 했다. 혀가 아릴정 도로 달아 연신 와인을 넘기던 아이스맨 옆에서 매버릭은 브라우니를 잘도 먹었다. 훌륭한 조종사가 되라는 덕담, 아직 결혼 생각은 없는지, 있다면 좋은 사람을 소개해줄 수도 있다는 말들 사이에서 아이스맨은 약간 취했다. 식탁 아래로 다리를 차는 매버릭의 발이 느껴지긴 했다. 이런 자리에서 그가 저보다 더 눈치가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 뭘 그렇게 봐. 아까 봤잖아.
- 저 빈자리는 제독님이랑 네 자리인가 생각하고 있었어.
함께 비틀거리며 복도를 지나치다 매버릭의 발이 문득 멈췄다. 초상화의 행렬 사이, 가장 마지막 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가간 아이스맨이 뒤에서 몸을 끌어안았다. 매버릭에게서 술 냄새와 초콜릿 냄새가 났다. 생각이 바뀌었어… 매버릭의 취한 입술이 우물거렸다.
- 여전히 전투기나 차나 총은 안 돼… 그렇지만 사랑에 빠져서 죽는 건 어쩔 수 없지.
누가 보면 안 될 걸 알면서도 몸을 더듬는 손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걷어 올린 셔츠 아래 열 오른 매버릭의 살갗이 부드럽고 뜨끈뜨끈했다.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정신없이 뛰는 심장을 꾹 누르려 했다. 물론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뺨을 감싼 채 키스를 퍼붓는 몸을 밀어내며 매버릭은 놀랄 만큼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일종의 선언이었다.
- 사랑에 빠지면 알려줘야 해. 알잖아. 나… 카잔스키의 죽음에 대비를 해야 하거든.
- 개소리하지 말고…
늘 나누던 대화가 조금 반대가 되었다는 게 웃겼다. 마주보고 있다 낄낄 웃음이 터졌다. 연신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매버릭을 거의 둘러업은 채 비틀비틀 복도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카잔스키의 눈이 쳐다보는 감각은 오싹했다. 방으로 돌아와 서로의 옷을 벗기고 입술을 빨다 어이없이 잠이 들은 게 다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혼자였다. 조카와의 약속이 있다며 일찍 인사를 하고 나갔다고, 참 싹싹한 친구더라며 웃는 어머니의 얼굴 앞에서 아이스맨은 멍했다. 머리를 마구 때리는 둔통이 와인 숙취 때문인지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게 마지막이었다. 애초에 둘은 소속이 달랐다. 늘 그래왔듯 배는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틀었다. 아이스맨이 보낸 몇 장의 편지와 전화엔 한결같은 답이 돌아왔다.
- 어때, 카잔스키. 사랑에 빠졌어? 나한테 꼭 알려줘야 해.
"으… 아파."
"아파도 싸. 몸 관리 제대로 안 하면 너 자격 탈락이래."
깜박거리던 녹색 눈이 눈웃음으로 빙그레 휜다. 저 표정을 보고 있으면 오랫동안 화를 낼 수 없지, 아이스맨이 혀를 찼다. 특별히 외상이 있던 게 아니라 며칠 동안 푹 쉬면 된다는 진단서와 서류엔 대신 서명을 했다. 가족이거나 딱히 책임져야 하는 관계는 아니다. 상관으로서 하는 서명인데도 어딘가 간지러웠다.
"안 가봐도 돼?"
"가야지… 누구랑 다르게 난 일이 많거든."
낄낄 웃던 입술이 세로로 갈라져 피가 방울방울 맺힌다. 맥주 거품과 에그타르트의 가루가 그러했듯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자 움찔 물러나는 매버릭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아랑곳없이 쓱 문지르자 엄지손가락에 길게 주홍빛 자국이 남았다.
"너 계속 답 안 해주더라."
"연락은 내가 계속했는데. 나만 했어."
"하핫. 그건 잘못했습니다, sir."
그 여자와는 잘 안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주 배에 오르고 파병을 나가는 군인. 제대로 시작해도 일방적인 기다림을 안기는 관계다.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선 이쪽이 더 애를 써야 하는데 아이스맨은 그러지 못했다. 매버릭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거는 데 쓰는 신경을 할애했더라면 좀 나은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에겐 다른 쪽에 쓸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변명과 수습에 꽤 진땀을 뺐지만 따로 무슨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이건 다 카잔스키의 불멸을 위해서라는 그의 짧은 농담에 아버지가 눈썹을 치켜올린 것이 전부였다.
"아직 모르겠어서 대답 못 했어. 몸 관리 잘해."
그것은 진실이었다. 매버릭은 사랑에 빠졌느냐 물었고 카잔스키는 여전히 불멸하느냐고 물었다. 모르겠다. 그래서 아이스맨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군 병원의 퀘퀘한 병실에 누운 건 저 대책 없는 놈인데 어쩌면 입원해야 하는 건 저일지도 모른다. 엉뚱한 박동으로 뛰는 저릿한 심장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필멸을 이야기하기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5.
그때의 그 여자와는 잘 안됐고, 그래서 아마도 다른 여자를 찾아야 할 거란 아이스맨의 말에 매버릭은 흐응 웃었다. 이틀을 꼬박 병원에 붙잡혀 있다 퇴원했다는 소식에 찾아갔건만 아이스맨도, 과일도 그다지 환영을 받진 못했다. 뽀득뽀득 씻어 내민 사과를 씹으면서도, 케이크를 사 올 줄 알았다며 대답하는 입술만 얄미웠을 뿐이다. 닿은 입술 사이로 몇 번 씹지도 못한 사과 알갱이가 넘어왔다. 이를 질겅일 때마다 과육이 씹혔다.
처음으로 같은 부대가 되었지만 그 시간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진급에는 도통 인연이 없는 매버릭과는 다르게 아이스맨은 이미 소령을 달았고, 중령을 준비하는 동안 몰려드는 일에 눈코 뜰 새도 없었다. 그 사이 매버릭은 다른 대륙의 한가운데로 날아서 가버렸다. 그는 저돌적인 조종사였다. 매버릭이 내전의 한가운데서 전투기를 모는 동안 아이스맨은 초조해하며 몇 개월에 한 번씩이나 간신히 오는 편지의 답장을 기다렸다. 나름대로 꾹꾹 눌러쓴 편지지는 악필로 가득했다. 하관 하나가 의가사제대를 했다는 둥, 음식이 영 입에 맞지 않는다는 둥, 시간이 되면 구스와 가족들에게도 인사를 해주라는 둥. 편지는 늘 같은 문장 두 개로 끝을 맺었다.
- 당연히 내가 더 훌륭한 조종사지, 윙맨.
- 어때, 카잔스키. 이젠 사랑에 빠졌어?
어떤 전화는 그런 웃음을 남기기도 했다.
- 와, 카잔스키. 나 진짜 이번엔 죽는 줄 알았다? 근데 카잔스키 불멸이 궁금해서 못 죽었잖아.
"아, 진짜. 지금 욕할 것 같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이번에도 잘 안됐어."
각자의 파병과 각자의 출항, 서로 다른 부대에서의 엇갈림은 매번 삶에 희미한 흔적만을 남겼다. 아이스맨이 워싱턴으로 떠났다 샌디에이고로 복귀했을 때 매버릭은 하와이 근처를 떠도는 식이었다. 매버릭이 그사이 스쳐 지나간 몇 명의 애인 이야기를 했을 때 아이스맨은 질세라 부모님이 얻어낸 몇 번의 소개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만남을 아무리 계속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이스맨은 어쩌면 제가, 사랑에 빠지지 않아 불멸하는 최초의 카잔스키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 아이스 너 돈 많이 모아야겠다. 진짜로 불멸하면 돈 필요하잖아."
"집에 많아."
- 부러워서 눈물이 다 나네요. 아, 알았어. 끊는다? 나 구스한테도 전화해야 해. 브래들리가 목소리 듣고 싶대. 다음은 드디어 캘리로 갈지도 모르겠어… 같은 부대 되면 좋겠습니다, 소령님.
기지의 낡아빠진 공중전화기를 손에 든 채 아이스맨은 한참을 서 있었다. 뒤에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끊긴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6.
매버릭은 드디어 캘리로 돌아왔다. 샌디에이고, 아이스맨이 있는 부대에.
얼굴을 보기도 전, 오자마자 꽤 다쳤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할 뻔했다. 퍼플 훈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수술 후 당분간 운신이 힘들다는 소식에 눈앞이 아찔했다. 누가 그따위로 전투기를 모느냐며 원망할 대상도 없었다. 훈련 중의 버드 스트라이크는 예상이 거의 불가능하다. 매버릭이 위험에 처한 동료나 하관을 버리고 갈 위인도 아니다. 그저 항상 비행과 차와 총을 조심하라 이야기하던 말을 일방적으로 지켜왔던 것이 이가 갈렸다. 얼음에 두 번이나 빠졌어도, 자전거와 함께 저택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카잔스키는 살아남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몸을 더 조심해야 하는 쪽은 매버릭에 가까웠으나 그는 말을 듣지 않는다. 차 조심은 하는지도 모르겠다. 좌우를 제대로 살피긴 하나? 바이크 탈 때 헬멧 제대로 쓰기는 하는지. 정말이지 뻔뻔하기 짝이 없다. 카잔스키도 아니면서. 피트 미첼이면서.
"나 카잔스키 얼마나 오래 살지 궁금해서 못 죽는 거 알잖아."
눈을 가늘게 뜬 매버릭이 깜박깜박 천장을 본다. 병원 특유의 냄새가 지독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밀려온 두통에 아이스맨이 이마를 짚었다. 눈치를 보는 것도 알고, 긴장을 풀어주려 하는 것도 알겠는데 정말로 화가 났다. 석고로 싸인 매버릭의 팔다리가 뚝딱거린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팔을 들어 하늘하늘 흔드는 손에 생채기가 가득하다.
"중령님. 화났어?"
"당연히 났지. 궁금해서 못 죽어? 너 죽을 뻔했어."
컵을 갖다 대자 받아마시는 입가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입술에 맥주 거품을 묻히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예쁜 얼굴이 슬그머니 웃는다. 매버릭의 입과 턱을 닦아주곤 침대 옆 의자에 주저앉은 아이스맨이 얼굴을 감쌌다. 손끝에 닿은 이마와 뺨으로 땀이 뚝뚝 번졌다.
또 다른 약혼 이야기가 오가다 흐지부지된 날, 어차피 결혼은 다 그런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말을 하며 아버지는 어머니의 잔에 와인을 가득 따라주었다. 어머니가 소리 내 웃고, 아버지는 따라 미소를 짓는다. 사랑에 빠진 카잔스키, 그래서 죽게 될 카잔스키. 늘 그렇듯 꽃향기가 나는 가벼운 와인이었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톰 카잔스키는 불멸하는 첫 카잔스키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저주 같은 것임을 깨달은 건 그때였다. 저택을 채운 수많은 초상화가 비웃음과 안쓰러움으로 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거긴 사랑에 빠져 실패한 이들의 자리가 아니었다. 사랑에 빠지는 데 성공한 이들이 설 수 있는 영광의 자리였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복도를 걷다 아이스맨은 문득 자리에 멈추어 섰다. 몇 년 전, 매버릭이 자리에 서 빈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바로 그 자리에.
"어때, 카잔스키. 이젠…"
누가 최고의 조종사냐는 질문처럼 반복되는 대화에도 바닥을 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늘 그렇듯 매버릭이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석고의 무게 때문에 군데군데 푹 가라앉은 낡은 침대는 바퀴가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이스맨이 오기 전, 저녁에 이미 한차례 동료들이 다녀간 듯 붕대 이곳저곳에 작은 낙서들이 있다. 팔을 뻗어 드러난 피부 사이를 훑자 울리던 매버릭의 웃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아이스, 미안해."
"미안한 짓 좀,"
"울지마. 미안해. 진짜 잘못했어."
인상을 찌푸린 아이스맨이 눈가를 매만졌다. 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손으로 얼굴을 쓸자 옅게 물기가 묻었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선 동안 매버릭이 얼굴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완전히 취해서 개소리를 한다며 혀를 차던 그날처럼 서늘한 손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항상 그랬듯. 매버릭을 보면, 그 웃음을 들으면, 너저분하게 다쳐 늘어진 모습을 보면 늘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안도인지 불안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공포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분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내내 두려워하던 그 감정일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초상화를 그려야겠어, 매버릭."
몸을 일으킨 아이스맨이 허리를 숙였다. 녹색 눈동자가 움직임을 따라 함께 흔들렸다. 소독약 냄새가 났다. 입가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걸 밀어내지 않는 건 언제나 그래왔듯 가벼운 제스쳐 같은 거라 생각해서일지 모른다. 그 긴 시간 동안 그저 농담인 양 주고받던 가볍고 뻔한 제스쳐.
"난 죽을 거야. 너 때문에."
아이스, 잠깐만… 소리는 곧 가볍게 뭉그러진다. 어깨를 때리던 매버릭의 손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머리칼을 움켜쥐었을 때 아이스맨은 눈을 감았다. 벌어진 입술로 뛰는 심장이 튀어나와 그대로 쓰러져 죽어버리진 않을까 생각하면서.
이건 진작에 예고된 맛이었다. 어쩌면 처음 매버릭을 만났던 그때부터 이미. 산산이 조각난, 톰 카잔스키의 마지막 불멸의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