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맵릉 - 사소한 싸움
오늘도 평소와 같이 아이스맨과 매버릭의 싸움은 사소하게 시작됐다. 넌 너무 위험해. 넌 너무 고리타분하지. 주고받는 말에 날이 서있으나 그 이상으로 공격하진 않았는데 유독 연속된 비행에 지쳐있던 매버릭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랑은 말도 섞기 싫어. 노려보며 내뱉는 못된 말에 말문이 막힌 아이스맨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 나갔다.
매버릭도 말을 뱉고 아차 싶었지만 먼저 다가가는 걸 어려워했던 터라 평소처럼 아이스맨이 다가오면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아이스맨은 매버릭이 보이기만 해도 굳은 얼굴로 그 자리를 피했고 매버릭은 충격받았다. 그 아이스맨이 매버릭이나 할법한 짓을 하다니.. 슬라이더도 놀랐는지 매버릭에게 다가와선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물었으나 매버릭을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매버릭의 말에 아이스맨, 아니 톰 카잔스키가 상처를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상처를 준 피트 미첼은 사과를 하고 싶어도 질렸다며 떠나버릴 거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머뭇거렸다. 항상 피트 미첼의 소중한 사람들은 피트를 두고 먼저 떠나갔다. 그 이별로 항상 상처를 받는 건 남겨진 피트뿐이었고 덕분에 살아있는 누군가에게 심한 상처를 준 적은 없었다.
외롭다고 생각하면서도 혼자를 자처하던 해군의 꼴통은 마더 구스나 알아차릴 수 있는 내향성을 겸비한 폐쇄적인 성격이었고 그만큼 그어 놓은 선까지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냈다. 그 말은 구스 말고는 매버릭의 안에 갇힌 피트 미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었으나 그 견고한 철문을 뚫은 이는 톰 카잔스키였다. 구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 문을 두드린 톰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아닌 좀 더 깊고 비틀린 애정으로 피트 미첼을 함락시켰다. 죽어도 넌 혼자 있을 수 없어. 너는 죽어서도 내 곁에 묻히게 될 거야. 회안에 드리워진 진득한 욕구가 피트가 외면해왔던 음습한 결핍을 채워줬다. 그리고 사귀기 시작한 두 사람은 예전과 똑같이 싸우고 화해하고 윙맨을 자처했기 때문에 둘의 서로의 애인이 됐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매버릭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안 하는 아이스맨을 멀리서 지켜보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 사랑은 너무 깊고 진하고 추접한 욕망이 섞여있어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말자고 합의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드러내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을 정도로 매버릭은 이 상황이 숨 막혔다. 매버릭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아이스맨이 유일한데 겨우 한순간의 분노로 그가 매버릭을 떠난다면 매버릭은 평생 땅을 치고 후회할 거다. 그런데 도무지 사과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 곁에 있는 슬라이더가 죽을 만큼 부러웠다. 나 좀 도와줘. 슬라이더에게 도움을 청하는 꿈을 꿀 정도로 매버릭은 조급해졌다. 결국 아이스맨이 본가로 가던 날 매버릭은 슬라이더를 붙잡았다. 나 좀 도와줘. 꿈에서 했던 말 그대로 내뱉자 슬라이더는 놀란 얼굴로 매버릭이 잡은 제 소매 끝을 바라보다 이놈들 둘이 뭔 사연이 있긴 한가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라이더는 충격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꼈다. 어떻게 둘이 사귀는데 이 꼬맹이는 몰라도 아이스맨마저 자기에게도 숨기고 몰래 연애를 했단 말인가. 그렇게 내가 못 미더웠나 하고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그래도 착한 슬라이더는 이 둘을 위해 해결사가 되어 주기로 했다. 사과해도 톰이 떠날 거 같아서 사과를 못하겠어. 그 두려움으로 여태껏 이 싸움을 끌어왔다고?! 매버릭의 상실에 대한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슬라이더는 아이고 꼬맹아 라는 말로 매버릭을 타박했으나 이내 땅으로 박아버릴 듯 고꾸라진 머리통을 잡아 올리며 내가 자리를 마련해 줄게 용기 내서 사과해! 하고 간단하고 빠른 해결 방법을 제시해 주곤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이 미친놈아 걔가 떠나면!"
"우리 꼬맹이는 너무 생각이 많구나. 그러다 진짜 아이맨이 떠나는 수가 있으니 그만하고 사과해."
그 말에 매버릭은 심장이 철렁하는 것처럼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맨의 RIO인 슬라이더의 말이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멈춤 없이 마련된 자리에는 싸늘한 표정의 아이스맨과 죄인의 모습으로 땅만 바라보는 매버릭, 생각보다 심각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는 슬라이더가 앉아 있었다. 이러다 체할 거 같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슬라이더는 화장실을 간다는 말을 끝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해결사는 이 정도쯤에서 빠져주는 게 좋은 거야. 매버릭이 들었으면 머리카락을 몽땅 잡아 뜯었을 말을 하며 그곳을 빠르게 벗어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 슬라이더에 속으로 온갖 욕을 하던 매버릭은 시계를 보며 혀를 차는 아이스맨을 보곤 나한테 질리면 저런 모습인 거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상상만 해오던 모습을 실제로 보니 참았던 눈물이 올라오고 막혀있던 입이 열렸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네 화가 풀릴 수 있다면 뭐든 하라는 대로 할 테니까 그렇게 나 귀찮다는 표정으로 보지 마."
녹안에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퐁퐁 흘러내리자 매버릭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던 아이스맨은 그 옆으로 옮겨가 매버릭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널 버릴 생각은 한순간도 한 적 없었어. 그 말이 오히려 매버릭을 자극했는지 이젠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한적한 레스토랑에 두 사람을 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아이스맨은 손가락으로 조용히 창밖을 가리켰다. 그 모습이 살벌해 남자는 먹던 것도 멈추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그제야 매버릭의 뺨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춘 아이스맨은 자기 품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는 매버릭을 보며 마음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 희열감을 느꼈다.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던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애교를 부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그 꼬리를 잡아당겨 아이스맨이 준비한 창살 달린 집에 가둬버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애초에 아이스맨은 매버릭의 말에 화가 난 적도 없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구스의 일로 인한 트라우마가 나아지지 않은 매버릭에게 비행은 엔도르핀이자 저주였다. 행복도 고통도 모두 안겨주었기에 받는 무의식 속 스트레스를 이해했다. 다만 한 가지 거슬렸던 것은 말도 섞기 싫다는 말보단 옆에 있던 울프맨에게 투정을 부리려는 모습이었다. 그런 행동은 나한테만 해야지. 그래서 아이스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버릭을 자기 생각만 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생각 이상으로 만족스러웠고 앞으로 매버릭의 곁을 어떻게 지킬지에 대한 고민의 답도 알게 해줬다. 아이스맨은 슬며시 미소를 띠었으나 순진해빠진 고양이는 알아채지 못하고 그 품에 안겨 여전히 울고 있었다. 자신이 덫에 걸린 줄도 모른 채 매버릭은 역시 톰은 착하다고 이런 톰한테 또 상처를 주지 말자고 다짐했다. 여전히 한적한 레스토랑에는 두 사람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