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글 - Say You Love Me
※ 구스 생존 IF
매버릭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지금 제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연말이 가까워져 올수록 캘리포니아 또한 기온이 떨어지는지라 머리칼은 흩뜨리고 가는 바람이 선선했다. 지금의 그처럼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한숨 자고 일어나기 딱 좋은 날씨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제 눈 위를 가리고 있는 이 거대한 손은 뭐람.
아직 완전히 잠기운을 떨쳐내지 못해 멍한 머리로 잠들기 전 상황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쓰며 눈동자를 굴리자 커다란 손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아직 매버릭이 깬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는 아이스맨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매버릭은 그들이 함께 구스의 병문안을 갔다가 날이 좋다는 핑계로 바로 부대로 복귀하지 않고 근처 공원에 들렀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처음에는 분명 그늘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은데 꽤 오래 잠들어 있었는지 그사이 이동한 해가 그들의 머리 위로 쨍쨍한 햇빛을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스는 그늘을 찾아 이동하는 대신 잠이 든 매버릭의 눈 위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던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고작 몇 초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매버릭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다시 한번 눈동자를 굴려 아이스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햇빛 아래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이나 아래서 올려다보고 있음에도 굴욕 없는 매끈한 턱 선, 그리고 얼굴 위에 그늘을 만들 정도로 길고 풍성한 속눈썹까지.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묘사라 해도 모자랄 것 없을 외모의 미남이 이렇게 (데이트하기) 좋은 날, 손수 햇빛을 가려주는 수고로움을 감수해가며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매버릭은 문득 떠오른 감상을 아직 잠이 덜 깨 멍한 머리를 거치는 대신 바로 입 밖으로 내었다.
아이스. 너 나 좋아하지.
멍한 정신에 충동적으로 뱉은 말이었으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아직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저를 부르자 그제야 읽고 있던 책에서 떨어진 아이스의 시선이 매버릭의 얼굴에 닿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아이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적이 있었나?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햇빛을 받아 옅은 회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매버릭은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키며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매버릭. 잠꼬대할 거면 들어가서 더 자는 게 어때.
Say You Love Me
5주간의 탑건 과정을 수료하고 바로 부대로 복귀하는 대신 USS 레이턴즈호를 구출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던 이들에게 3주간의 특별 휴가가 주어졌다. 미라마 해군기지로 복귀한 이들은 처음 며칠 동안은 갑작스러운 유명세를 즐기며 근처 바(bar)로 나들이를 갔지만 아무리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라 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을 알아보고 몰려드는 인파에 얼마 지나지 않아 질려버렸다. 결국 탑건 과정을 이수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부대 안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게 된 이들 사이에서는 사실 이건 휴가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관심이 식을 때까지 한곳에 붙잡아 두려는 해군 상부의 고도의 전략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공공연히 오갔다. 하나둘, 함께 탑건 과정을 수료한 동료들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화려한 휴가 계획 대부분을 취소하고 그들의 얼굴을 보러 캘리포니아까지 날아온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임시 숙소를 나가는 중에도 그들에게 주어진 휴가를 알차게 쓰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미그기 6대를 격추한 주역 중 한 사람인 매버릭이었다.
그들이 반강제적으로 미라마 해군기지 근처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매버릭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스를 찾았다. 훈련 중이었던 아찔한 사고 후 꽤 오랜 시간 의식을 되찾지 못했던 구스는 매버릭이 USS 레이턴즈호 구출 임무에 차출되었을 때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한 뒤 경과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미라마 기지로 복귀하는 항모에서 그의 RIO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매버릭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항모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구스의 병실로 달려가 그의 빠른 회복을 기원했지만, 그 후로도 매일 같이 얼굴도장을 찍는 이는 매버릭과 그들이 휘말린 사고에 책임감을 느끼던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두 사람이었다. 사고 직전까지만 해도 탑건 수석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두 사람은 레이턴즈호 미션을 계기로 부쩍 가까워졌다. 아니, 적어도 매버릭은 그렇게 생각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는 법이었고, 함께 미그기 6대를 격추한 일은 평생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았던 두 사람 사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미라마로 돌아오는 동안 물과 기름처럼 평생 섞일 일 없을 것 같았던 매버릭과 아이스는 그들의 영웅담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그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해야만 했다. 물론 이번 임무를 계기로 서로를 ‘윙맨’으로 인정했다고 하여 하루아침에 천지가 개벽하듯 사람이 바뀌는 일은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로 부딪히고는 했다. 하지만 (강제로)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매버릭은 (절대 쉽지 않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톰 카잔스키가 훨씬 더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물론 매버릭도 아무 이유 없이 아이스맨에게 날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인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살다 보면 원치 않더라도 타인의 평가에 예민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렇다 보니 자신을 ‘위험하다’던가 ‘문제’라고 칭하는 아이스맨에 대한 첫인상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함께 미그기를 격추한 일을 계기로 매버릭은 잠시 지금껏 쓰고 있던 색안경을 내려놓고 톰 카잔스키에 대한 평가를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이스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고는 고리타분한 모범생의 잔소리뿐일 거라는 색안경을 벗고 나자 매버릭이 마주한 것은 그를 향한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과 조언이었다. 아이스의 조언을 따라 나쁜 일은 없었으며, 함께 전투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무려 재밌기까지 했다. 어느새 매버릭은 톰 카잔스키와 보내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위와 같은 연유로 매버릭은 미라마 기지에 도착하고 난 뒤로도 자연스럽게 아이스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
어제와 같은 참사(?)가 있었던 것이다.
매버릭은 실로 오랜만에 홀로 구스의 병실을 찾아 하소연 중이었다. 3주간의 휴가는 이미 반 이상이 지나 있었고, 그 사이 아이스와 매버릭 사이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일들을 돌이켜 생각할수록 아이스 그 망할 녀석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아니 대체 누가 고작 5주 (이제는 7주지만) 본 직장 동료의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자기 손가락으로 닦아줘? 얼굴을 알아보고 모여드는 인파에 곤란해하자 자기 RIO도 버려두고 몰래 바(bar) 뒷문으로 둘이서만 도망치자고 손을 이끄냐고. 그런데도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나 이렇게 어장관리 당한 거야? 내가? 피트 매버릭 미첼이?
"그러니까, 아이스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걔는 한사코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생각할수록 억울한지 주먹을 부들부들 떨던 매버릭은 구스의 말에 고개가 떨어지라 끄덕였다. 그래. 아이스는 저를 좋아하냐는 매버릭의 말에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깔끔하게 부정했다. 고백도 하기 전에 들켜서 부끄러운 건가?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그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던 어제의 매버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너 이미 다 들켰어.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 봐. 잔디밭에 누워있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고, 옷에 묻은 풀을 떼어주면서도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렇게, 임시로 머무르고 있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도록 진심을 털어놓기를 종용했으나 아이스는 그런 매버릭이 귀찮다는 듯 가끔 눈썹이나 꿈틀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임시로 머무는 숙소 앞에 도착했을 때 매버릭은 내심 기대했다. 여기서 인사하고 헤어지면 끝인데 이제는 속마음을 털어놓겠지. 하지만 아이스는 끝까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니 오늘은 일찍 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남기고 아이스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그대로 성큼성큼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매버릭은 혼란에 빠졌다.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내가 잠이 덜 깨서 착각했던 걸까? 하지만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구스의 사고 이후 우울해하는 자신을 위로할 것도, 매일 같이 병문안에 동행하는 것도, 이 황금 같은 휴가의 대부분을 함께 보낼 이유도 없지 않은가.
"매버릭."
매버릭의 구구절절한 하소연을 모두 들은 구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려던 때, 정말 기막힌 타이밍으로 아이스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분명 병실의 주인은 구스일진대도 자연스럽게 매버릭의 이름을 먼저 부르며 들어온 아이스는 침대에 앉아있는 구스에게는 "오늘 몸은 좀 어때?"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건네고는, 곧 그를 쳐다보지도 않는 매버릭의 뒤통수에 말을 걸었다.
"왜 말도 없이 혼자 왔어."
"쪽지 남겨 뒀잖아."
"그래. 다른 사람들 발에 밟혀서 복도 끝에 있는 걸 한참 만에 찾았지."
포스트잇에 써서 문에 붙여 놓은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찢은 종이 쪼가리에 메시지를 적어 두고 가는 사람이 어딨어? 그렇게 말하며 톰 카잔스키가 주머니에서 꺼내든 종이는 정말로 여러 사람의 발에 밟혀 바닥을 굴러다녔는지 엉망으로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딱 수틀린 매버릭이 어디 한번 엿 먹어보라고 할만한 짓이었다. 안 봐도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그려지는 상황에 구스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 세수를 했다.
"구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간호사를 부를까?"
"너스콜 보다 직접 뛰어가는 게 더 빠를지도 몰라."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답이 늦었지만 아이스맨, 내 상태는 아주 좋아. 둘 다 늘 나를 병풍 취급하더니 이럴 땐 반응이 요란하네."
그런 구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앉아있던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로 급하게 몸을 일으키는 매버릭과 당장에라도 복도로 뛰쳐나갈 것만 같은 아이스를 대충 손을 휘저어 만류하며 구스가 은근히 뼈 있는 말을 던졌다.
"그냥 오늘은 이만 좀 쉬고 싶어. 내일 캐롤과 브래들리가 오기로 했거든."
"정말?"
곧이어 구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예상치 못한 인물들의 이름에 매버릭은 눈을 반짝였고, 무어라 반박하려던 아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구스의 입원 기간이 길어지며 집으로 돌아갔던 두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매버릭은 앞에 구스가 던진 말을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 나는 내일 도착할 두 사람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두고 싶으니 오늘은 이만 가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구스. 그래도 ‘나’는 내일 와도 괜찮은 거지?"
부드럽지만 단호한 축객령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되묻는 매버릭에 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브래들리의 선물을 사야겠다며 쏜살같이 달려 나간 매버릭 덕분에 병실에는 잠시 구스와 아이스, 둘만이 남았다.
"넌 안 돼, 아이스. 내일은 '브래드쇼'들끼리 시간을 보낼 거야."
먼저 선수를 쳐 아예 아이스의 입을 막아버린 구스가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누웠다. 가슴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고 그 위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채 눈까지 감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아이스는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병실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오랜만에 브래들리를 만날 생각에 들떠 바리바리 선물을 싸 들고 구스의 병실을 찾은 매버릭은 눈 앞에 펼쳐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사탕을 뺏긴 아이 같은 표정을 했다.
"캐롤과 브래들리는…?"
내 사랑스럽고 귀여운 브래드쇼들은 어디 가고 저 시꺼먼 녀석이 여기 있어. 약혼자가 자기를 보러왔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며 가장 먼저 숙소를 나간 놈이 왜. 마치 그렇게 묻는 듯한 매버릭의 시선에 '매버릭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브래드쇼'가 아닌 슬라이더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길 도와주려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왔더니 대놓고 실망한 표정이네."
"네가 뭘 도와주러 왔는데. 지금까지 구스 병문안은 두 번밖에 안 온 녀석이."
"구스가 아니라 너 때문에 온 거라니까, 이 눈치 없는 자식아. 사실 네 문제였으면 안 오려고 했는데, 아이스 그 자식이 문제라니 녀석의 RIO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
"뭐?"
슬라이더가 뭐라 중얼거리던 한 귀로 흘리며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브래들리의 선물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던 매버릭이 빛의 속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여기서 아이스가 왜 나와?
"일단 자리에 앉아, 매브. 오늘 캐롤과 브래들리는 안 올 거야. 그리고 슬라이더는 내가 불렀어. 그렇게 배신감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보기 전에 우리 얘기도 좀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저와 슬라이더를 번갈아 바라보는 매버릭에 구스가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권했다. 여전히 불신에 가득 찬 눈초리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도 매버릭은 구스의 말에 이제는 그의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침대 옆 의자에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네가 건강을 회복해서 정말 다행이야, 구스. 저 고집쟁이 녀석이 네 말은 듣잖아."
"닥쳐, 슬라이더."
험한 말을 들었음에도 얌전히 구스의 말을 들은 것과는 별개로 제게는 긁으면 긁는 대로 반응하는 매버릭이 재밌었는지 킬킬거리며 웃은 슬라이더가 말을 이었다.
"톰이 널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다면서."
"… 구스!"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슬라이더가 던진 폭탄 발언이 효과를 발휘하기까지 잠시간의 딜레이가 있었다. 그가 말하는 '톰'이 '아이스'라는 것을 한 발 더디게 깨달은 매버릭은 누가 꼬리에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맵, 매버릭. 진정해. 네가 말하기 전부터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구스. 난 널 믿었는데! 그토록 믿었던 그의 RIO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매버릭을 진정시키는 것은 이번에도 구스의 몫이었다. 그 짧은 사이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힌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매버릭에 구스가 슬라이더를 노려보았다. 조금만 더 시뻘겋게 달아오른 매버릭의 얼굴을 보고 낄낄거렸다가는 구스까지 합세해 저에게 소리를 지를 기세라 애써 목을 가다듬은 슬라이더가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스가 너를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다면서?"
톰 카잔스키가 언제부터 너한테 관심이 있었는지, 이 형님이 알려주지.
"… 어쨌거나, 내가 보기에는 그래."
꽤 오랫동안 이어진 슬라이더의 말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슬라이더가 이야기를 풀어놓는 동안 저도 모르는 사이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매버릭은 갑작스럽게 쏟아진 많은 정보량을 처리하기 위해 끙끙댔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해사에서부터 탑건까지 가장 가까이서 그를 지켜봐 온 슬라이더가 보기에 아이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 같은데.
"아니, 그렇다면 대체 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
슬라이더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제보다 배로 억울해진 매버릭이 빽 소리를 질렀다. 진짜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가? 걔가 부끄러움도 타?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냐고 묻는 매버릭의 눈빛에 슬라이더가 우쭐한 표정을 했다.
"재수 없다 생각하지 말고 들어, 매버릭. 하긴. 지금은 너도 눈에 콩깍지가 씌었으니 인정하기 쉽겠지. 객관적으로 그 녀석, 잘 났지?"
억울한 마음에 두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던 매버릭이 잠시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기대한 것만큼 재밌었는지, 아니면 자기 파일럿이 인정받은 것이 기쁜 것인지 씩 웃은 슬라이더가 말을 이었다.
"그런 녀석이 지금까지 연애 한 번 안 해봤을 리 없어, 그렇지?"
이번에도 잠시 딜레이가 있고 난 뒤 매버릭의 고개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아이스가 잘났다는 사실을 이렇게 하나씩 인정하고 있는 것이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자신 또한 연애를 안 해본 것이 아니기에 아이스의 과거 정도는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야. 그 녀석이 만난 사람들 모두 먼저 그 녀석에 접근한 사람들뿐이었다는 거지."
"… 그런데?"
"그런 데는 뭐가 그런 데야. 그 녀석은 지금까지 자기가 좋다는 사람들하고만 연애했었다고. 자기가 좋아서 먼저 다가간 사람은 없었다는 말이야."
슬라이더는 자랑스럽다는 듯 말을 마쳤으나 매버릭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으로 지금껏 뒤에서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던 구스를 바라보았다.
"슬라이더 말의 요지는, 아이스맨은 자신이 좋아한다는 감정을 자각하는데 서투를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아."
"진짜 어떻게 네 녀석이 먼저 눈치를 챘지."
구스의 부연 설명이 있고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매버릭에 슬라이더가 혀를 찼다. 하지만 매버릭은 이미 쓸모를 다한 슬라이더를 가볍게 무시하고 새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래, 그런 문제라면 지금까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정한 일에 대해서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수 있었다. 늘 남의 고백만 받던 놈이니 먼저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하기도,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았겠지.
하지만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는 법이었다.
"좋아. 정했어."
잠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매버릭이 개운하다는 듯 내뱉은 말에 구스는 희미한 불안감을 느꼈다. 대체 뭘 하려는 거냐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구스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인 매버릭이 슬라이더에게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톰 카잔스키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게 해주지."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그 녀석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는 놈이라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 코웃음 치는 슬라이더에도 매버릭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지 씩 웃었다.
"미안한데 슬라이더, 지금까지 내 노래에 넘어오지 않은 사람은-."
"매버릭. 정말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아이스를 꼬시겠다고 그 앞에서 노래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왜 그래, 구스. 네가 못 도와줘서 그래? 물론 우리 둘의 콤비가 환상적이기는 하지만 설마 이미 나에게 마음이 있는 녀석을 나 혼자 못 꼬실까 봐."
"… 진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거?"
열심히 만류하는 구스와 그럼에도 자신감에 가득 찬 매버릭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슬라이더가 어이없다는 투로 불쑥 끼어들었다.
"아, 왜. 슬라이더. 너도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봤잖아."
너는 대체 애를 얼마나 끼고 키운 거냐며 힐난의 눈빛을 보내는 슬라이더를 외면한 구스를 대신하여 매버릭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구스와 달리 매버릭의 품 안의 자식처럼 끼고돌며 세상의 풍파에서 지켜줄 생각이 없는 슬라이더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 뒤로 찰리 교관이랑 몇 번 데이트한 거? 매버릭. 그거 다 네 얼굴 때문이야.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라. 네가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데이트는커녕 음치라고 욕이나 먹었을걸."
그럼 어떡해?
으음.
구스, 넌 캐롤의 마음을 어떻게 얻었어?
… 우리는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라.
… 슬라이더. 넌 약혼자의 마음을 어떻게 훔쳤어?
내 지적인 면을-.
헛소리하지 말고.
육체미를 과시했지.
우리 다 같이 웃통 벗고. 그래, 구스. 넌 빼고. 어쨌거나 웃통 벗고 같이 비치발리볼도 했었잖아. 그때도 별 반응 없었잖아.
"난 이만 가봐야겠다."
너는 사실 구제할 수 없는 음치다, 라는 팩트로 한동안 매버릭을 충격에 빠뜨린 죄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아이스의 입에서 먼저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게 할 방법을 함께 고민하던 슬라이더는 어느새 창문 밖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을 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매버릭. 너도 이만 가봐."
"으응. 내일 또 올게."
자신이 음치라는 사실이 그렇게도 충격적인지, 아니면 여전히 아이스의 입에서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중인지 매버릭은 구스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슬라이더와 함께 그의 병실을 나섰다.
"매버릭."
그렇게 긴 병원 복도를 지나 정문을 나선 두 사람이 헤어지기 전, 슬라이더가 말문을 열었다.
"어젯밤에 부대 관련 통화할 일이 있어서 들었는데, 내일부터 아이스는 가족들이랑 시간을 보내게 돼서 한동안 부대 밖에 있을 거야. 아들이 집에 못 온다고 하니 가족들이 다 같이 캘리포니아로 왔다고 했거든. 아마 돌아가면 네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 말을 해주려고."
갑작스럽게 아이스의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는 슬라이더에 매버릭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왜 지금 그 얘기를 꺼내는 건데?라고 묻는 것 같은 얼굴에 슬라이더의 입에서 못 말리겠다는 듯한 웃음이 샜다.
"넌 진짜 얼굴에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다 드러나서 어떡하냐."
"그래서 불만이야?"
"뭐. 내가 불만 가질 필요는 없지. 어차피 며칠 후 각자 부대로 복귀하면 자주 보기 힘들 텐데."
어깨를 으쓱이며 답하는 슬라이더의 말에 매버릭이 이번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슬라이더의 말대로 아이스의 가족이 그를 보기 위해 캘리포니아까지 왔다면 남은 시간은 그들과 보내는 것이 맞을 터였다. 그러면 자연히 아이스랑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겠지.
"또, 또. 얼굴에 무슨 생각하는지 다 드러난다니까? 인상 쓰지 마, 주름 생긴다."
"아! 슬라이더!"
매버릭은 불쑥 손을 내밀어 제 미간을 꾹꾹 누르는 슬라이더의 행동에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래, 이제야 좀 너답다. 매버릭." 하지만 매버릭이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소리쳤음에도 호탕하게 웃어 보인 슬라이더가 말을 이었다.
"아이스맨이 옆에 없는 동안 더 열심히 고민해 봐. 어떻게 하면 아이스맨에게서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왜' 그 녀석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허락도 없이 제 얼굴에 손을 댄 복수로 몰래 그의 발을 콱 밟아줄 기회를 노리던 매버릭은 슬라이더가 덧붙인 말에 순간 눈을 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만 간다."
하지만 슬라이더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는지 커다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미련 없이 멀어져 갔다. 꼭 그의 파일럿이 그랬던 것처럼 매버릭 혼자 깊은 생각에 잠기게 둔 채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구스의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던 매버릭은 숙소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인영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지금과 같은 자리에 서서 부모님이 오셨다고, 아무래도 며칠 동안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은 게 일주일 전이었다. 길게만 느껴졌던 3주간의 휴가는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러 오늘이 지나면 3일만 남게 된다.
아이스마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임시 숙소를 나가 있는 동안 매버릭은 슬라이더가 남기고 간 숙제에 매달렸다. 아니, 사실 숙제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자존심 때문에 그 답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는 점이었지만,
"오늘도 구스의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인가?"
온다는 말도 없이 제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스의 얼굴을 본 순간 매버릭은 조바심이 났다. 자신은 교관으로 탑건에 남겠지만 3일 뒤면 아이스는 자신의 부대로 복귀할 터였다. 앞으로 또 언제, 어디서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을지 기약 없는 헤어짐이었다.
"매버릭?"
자신의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걱정이 되었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아이스의 얼굴이 변함없이 다정하였기에 매버릭은 그에게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었던 때처럼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나한테 왜 잘해줘? 이 나쁜 자식아."
"아이스, 괜찮아?"
"어? 어."
걱정스러운 슬라이더의 물음에 대충 답한 아이스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팔로 눈을 가렸다. 옆에서 정말 괜찮은 게 맞냐며 슬라이더가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는 대충 손만 휘적여 답한 아이스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매버릭, 갑자기 왜 이래?'
'꺼져! 망할 카잔스키.'
'너 울어?'
'내가 울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저를 보자마자 뭐에 그리 화가 났는지 거하게 욕을 뱉은 매버릭은 팔을 들어 거칠게 제 눈가를 문질렀다. 안 그래도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벅벅 문대는 몸짓에 속이 터진 아이스가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매버릭은 더욱 바락바락 악을 쓰며 그에게 소리칠 뿐이었다.
'너 이러는 거 하나도 안 고마워.'
'그래,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그만해, 미첼.'
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으면서도 이제는 눈물까지 뚝뚝 흘리기 시작한 매버릭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아이스는 사과의 말을 건넸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울지-.
'이것 봐, 하나도 모르면서.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여전히 귓가에 생생히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이스가 마른 세수를 했다. 매버릭은 자신의 말에 아이스가 얼어있는 틈을 타 그대로 그를 지나쳐 자신의 숙소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그리고 지금도 고장 난 테이프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목소리에 아이스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처음 저를 좋아하는 거냐고 묻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왜 일주일 만에 그렇게 서럽게 바뀐 건지. 왜 자신은 발갛게 달아오른 그 눈가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는 건지.
이제는 연달아 한숨을 푹푹 내쉬기 시작한 아이스에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어 강제로라도 일으켜 대화해 보려던 슬라이더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아이스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그 꼴통이 아이스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 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아이스, 우리 복귀가 3일 남았던가?"
"… 응."
"남은 시간이 얼마 없네."
"… …"
사족처럼 덧붙인 말에 답이 없는 아이스를 보며 슬라이더가 매버릭 때와는 달리 파트너의 의리로 소리 죽여 웃었다. 얼마 남지 않은 휴가 기간,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길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