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염 - 진실과 진심
※ 구스 생존 IF
※ 1986 탑건 배경
다트 보드 앞에 선 해군들은 난이도를 올려보기로 했다. 느슨해지는 내기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다. 술이 들어가면 아무래도 바보 같은 규칙을 만들고 싶은 법이다.
"최종 승자가 이 자리에 자기 부대 걸기."
한 명이 보드 바로 옆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른바 명예의 전당. 1986년 오늘 새로 문을 연 미라마의 바에서 비공식 다트 챔피언을 차지할 이의 자리다. 괜찮은데? 동의의 웅성거림이 자리를 휩쓸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눈을 가리고 가운데를 맞추는 건 어때."
"되겠냐? 다들 할 수 있겠어?"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좋아."
제안에 즉시 반응한 남자가 있었다.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다른 탑건 교육생처럼 개업 소문을 듣고 온 매버릭이다.
그냥 가운데를 맞추는 것은 뻔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 게임에 흥미가 없었던 그였다. 하지만 눈을 가린다면 얘기가 다르지.
모두 눈을 가린 후 공평하게 세 번의 기회. 바뀐 규칙에 매버릭도 자신 있게 참가했다.
결과물은 6. 6. 8. 그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 점수를 받은 것에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눈을 가리는 건 충분히 어려운 과제다. 엉뚱한 곳을 맞히거나, 판에 맞지도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매버릭의 눈에 그런 건 보이지도 않았다.
악조건은 문제가 아니다. 제 다트가 가운데에 맞지 않았다. 목표했던 높은 점수에 맞지 않았다.
커다란 녹색 눈엔 오직 그것만 보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조준하고 정확하게 사격할 수 있는 내가.
다들 포기하고 자리를 떠난 뒤에도 매버릭은 눈을 감고 계속 던졌다. 마지막까지 어울리던 구스도 두 손을 들었다. 매버릭은 6. 7. 대개 이 언저리에 있는 준수한 성적이었다. 간혹 9점에는 이르더라도 좀처럼 정중앙은 맞추지 못했다. 즉, 그 9점도 요행이라는 뜻이겠지.
"매브, 아직도 할 거야?"
구스가 껍질을 깐 땅콩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우리 것도 아무 데나 붙이자. 구석이면 어때. 자리 다 뺏기겠네."
"아직 안 됐어."
매버릭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뭔가에 버튼이 눌린 매버릭의 눈빛을 보자 절대 자리를 뜨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누가 너를 말리겠냐."
귀한 외출 시간이 흘러가는구나- 익숙한 상황에 구스는 단념하고 맥주를 하나 더 주문했다.
보드에 박힌 다트를 뽑은 매버릭이 다시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야 그만 좀 해라. 우리도 하자."
슬라이더가 다가왔다. 매버릭이 돌아보니 어느새 낯익은 대여섯 명이 제 뒤통수를 보고 있었다.
"알았어."
매버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에 든 다트를 건넸다. 근처에 있던 구스의 곁으로 와 앉았다. 구스가 땅콩이 든 접시를 권했지만 매버릭은 못 봤다. 시선은 여전히 저쪽에 둔 채였다.
슬라이더가 던지는 다트는 가운데와는 영 관계없는 곳으로만 날아가 박혔다.
'형편없어….'
매버릭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눈도 뜨고 있잖아.
울프맨, 할리우드, 치퍼, 선다운까지. "이거 꽤 어려운데?" 이들은 즐겁게 중얼거렸다. 대체로 무난한 수준이었다. 하나 정도는 가운데에 근접하게 나머지는 주변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마치자 슬라이더가 말했다.
"아이스 너도 해보지 그래?"
슬라이더가 옆에 앉아서 보던 아이스에게 말했다. 아이스는 보드카를 마시는 중이었다. 슬라이더는 다트를 모아 건넸다. 잔에 남아있던 술을 끝낸 아이스가 손을 내밀어 받았다.
자리를 잡은 아이스는 잠시 가만히 서서 과녁을 응시했다.
폼 더럽게 잡네. 매버릭이 픽 웃으며 미지근해진 자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팍, 팍, 팟. 아이스는 조용히 3개를 던졌고, 다트는 모두 10점에 꽂혔다.
와우. 뒤에서 할리우드가 말했다. 구경하던 이들도 손뼉을 쳤다. 매버릭은 마시던 병을 놓칠 뻔했다. 뭐야? 나도 3개를 다 꽂진 못했는데.
"전혀 녹슬지 않았네." 슬라이더가 호탕하게 웃었다.
"와, 대단한데 아이스맨? 구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스는 원래 잘했어. 우리 부대에서도 챔피언이었다고."
슬라이더의 찬사에 아이스는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사람에게 다트를 건넸다.
"그거 눈 가리고 할 수 있어?"
매버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게 진짜야." 매버릭이 애써 평정을 유지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울프맨이 물었다.
"아까 그러고들 놀았거든."
구스가 다트 보드 옆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저 빈 자리를 걸고 내기 중이야. 참가는 자유."
"재밌을 거 같은데?"
그 말에 슬라이더들도 흥미를 보였다. 새하얀 벽에 첫 번째 전통이 되는 뿌듯함. 해볼까? 그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 먼저 할래?" 슬라이더가 물었다.
"난 잠깐 볼게."
아이스는 옆에 서서 다른 사람이 하는 모습을 신중하게 지켜봤다. 슬라이더는 차례대로 모두의 눈을 가려주었다. 아이스의 차례가 왔을 때도 그러려고 했다.
"내가 가릴래."
매버릭이 아이스의 옆으로 가며 말했다.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슬라이더라면 아이스를 위해 살짝 손가락을 벌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구스라면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도 구스에게 그렇게 해줬을 테니)
그러나 매브의 신장으로 아이스의 눈을 가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매버릭은 필요 이상으로 어깨와 팔을 올려야 하는 자기의 자세를 문득 의식했다. 순간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매브, 그냥 내가 할게." 구스가 다가와 자연스럽게 교대를 권했다.
"구스의 말을 듣지 그래?"
아이스가 말했다. 매버릭은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과 마주쳤다.
"아냐 괜찮아, 구스."
매버릭은 어깨를 좀 풀고, 그대로 아이스의 눈을 가렸다. 오기를 부린다 싶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흥미로운 내기에 구경꾼이 늘었다. 이른 시간이긴 해도 바에 있는 손님의 대부분은 여기 모인 것 같았다.
모두 과녁을 볼 때 매버릭은 아이스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제 손바닥 뒤로 그가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스의 다트가 꽂힌다. 8. 9. 마지막으로 10.
"불스아이!"
슬라이더가 외쳤다. 그와 구경꾼들이 박수를 보냈다. 와오! 어디선가 삐익-하는 휘파람 소리도 들렸다.
"네 차례야, 매버릭."
아이스가 다트를 건넸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은 쉽게 매버릭의 시야를 덮었다.
8. 7. 젠장. 매버릭은 이를 뿌득 물었다. 망했다. 마지막 다트는 5에 꽂혔다. 평정을 잃은 탓인지 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아이스가 이겼네."
사실이지만 할리우드의 말이 얄미웠다. 서로 하이 파이브를 하며 아이스의 어깨를 안거나 두드렸다.
"여긴 이제 우리 자리다!"
슬라이더가 주먹으로 명예의 전당을 쳤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 사이로 매버릭은 뻣뻣하게 서 있었다.
"잘했어, 매브." 구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 구스 난……."
이건 전혀 잘한 게 아니야! 이건……. 이렇게 형편없는 점수를 받은 건 처음이다. 매버릭은 굳어가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술기운 돌아서 그래. 나도 아까 맥주 한 병 빨고 했더니 과녁이 두 개로 보이더라."
매버릭은 자기가 한 병도 채 마시지 않은 걸 떠올리고 더 심각해졌다. 심지어 아이스가 마신 게 도수도 훨씬 셀 거다.
자신감을 보였는데도 졌다. 저들보다 먼저 연습도 했다. 안 될 이유가 없는데 안 됐다. ‘매버릭’은 그런 사람이어서는 안 됐는데. 하필 상대가 아이스였다는 것도.
"우린 어른이잖아 매브~ 게임에 목숨 거는 가여운 애들은 봐주자고."
"무슨 소리냐? 누가 봐도 우리가 어른이지." 슬라이더가 말했지만 구스가 그를 보면서 얌마 눈치 챙기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나 먹으러 가자. 나 아사 직전이야, 매브. 버거 먹을래? 아니면 중국 음식도 괜찮은데."
"……."
구스가 어깨를 잡고 방향을 돌렸다. 매버릭은 영혼 없이 따라 움직였다. 온몸으로 마음에 안 드는 기운을 뿜어냈다.
"승부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안 되어있군."
뒤에서 아이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버릭이 뒤를 돌았다.
"내가?"
아이스맨이 눈으로 대답했다. 그래 너.
"남이 전력을 다하는 게 그렇게 불만이신가, 아이스맨?"
"이건 그냥 다트야. 분별없이 피곤한 경쟁에 집착하는군."
"그래, 난 뭘 하든 져도 괜찮다는 생각은 도저히 안 들거든. 그냥 다트라도."
"배구는 아닌가? 지는 걸 받아들일 수 없어 도망쳤지."
"그건 데이트가 있어서 그랬던 거거든!"
"데이트? 그럼 이번에는 무슨 핑계지. 구스인가?"
주변에서 둘의 눈치를 살폈다. 특히 아이스가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말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치고는 감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진정해. 둘 다 날 사랑한다는 건 알겠으니까 그만 해결하자고."
구스가 가운데로 끼어들었다.
"좋은 친구에게 고마워해야겠군. 너랑 어울리는 일이 쉽지 않을 테니까. 안 그래?"
"네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러고 있어, 카잔스키."
아이스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매버릭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잘됐네. 나도 그런데."
매버릭은 비웃으며 바를 나왔다. 한편으론 뭔가에 찔린 기분이다. 귀담아듣지 않으려곤 하지만 아이스의 말은 항상 그를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그가 불편하다.
"난 진짜 배가 고픈 거야 매브."
구스가 친구의 경직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탑건의 일정은 빡빡했다. 매버릭이 다음 그 바에 재방문한 건 며칠 뒤였다. 벌써 벽이 알록달록 꽉 찼다. 명당에는 번개를 쥔 주먹이 붙어 있었다. 아이스가 붙였는지 슬라이더가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저건 아이스의 물건이었을 거다.
면회 금지 표시가 붙은 입원실 밖에 이름이 붙어있었다. 닉 브래드쇼. 늘 구스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가끔 어색하다.
매버릭은 넋을 놓은 채 접수실 앞에 늘어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면회는 안 되는 모양이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수업 중에 나왔는지 카키색 차림의 아이스가 있었다. 매버릭은 그를 힘없이 올려다보곤 도로 고개를 숙였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대."
아이스는 옆에 앉았다. 평소였다면 단둘이 있는 건 어색했겠지만 지금 매버릭은 의식할 힘도 없었다.
"넌 왜 온 거야?"
"나도 그의 친구니까."
아이스는 매버릭의 얼굴을 보았다. 입술에는 물기가 하나도 없이 쩍쩍 갈라진 반면 눈가는 짓무르고 충혈되어 있었다. 속눈썹은 푹 젖었다. 입은 옷은 구겨졌다. 사고 후 이틀이 지났다. 매버릭도 검사로 하루는 병원에서 보냈다. 바로 퇴원 조치를 받았지만 계속 여기 있었다. 구스의 수술은 성공적이라 들었지만 의식이 없다. 그동안 매버릭은 뭘 먹지도, 잠을 잔 사람 같지도 않았다.
"우선은 나만 면회 허락을 받았어."
아이스가 말했다. 훈련 때문에 다른 동료들은 오지 못했다. 아이스는 따로 교관을 찾아가 자신이 느끼는 책임감에 대해 말했고, 바이퍼 중령과 제스터 소령 모두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이곳엔 둘 뿐이었다. 매버릭과 아이스맨.
"곧 캐롤…… 구스의 부인과 아들이 올 거야."
그 말을 하며 매버릭은 몸을 더 움츠렸다. 무섭다.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지.
아니, 할 수나 있을지.
"만약 구스가……."
"……."
"……이대로……."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매버릭은 차마 문장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사고 날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매버릭이 원망스럽게 중얼거렸다.
"넌 내가 언젠가 이런 짓을 저지를 놈이란 걸 알았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하지 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안 그래? 위험하고, 남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고집불통이고, 내가 하는 짓이 다 보였잖아!"
매버릭은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누군가 욕하고 혼내주길 바랐다. 아이스라면 네 탓이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스는 그를 혼내긴커녕, 처음으로 '미첼'이라 부르며 위로까지 해주었다.
"왜 날 탓하지 않는 거냐고……."
그때부터 길을 잃은 기분이다.
모든 게 후회되는데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매버릭은 눈물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거칠게 숨 쉬며 울었다. 병원은 누가 울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앞에서, 그것도 아이스의 앞에서 울 줄은 몰랐다.
아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남자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지친 매버릭은 잠시 기억이 끊겼다.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매버릭은 깜빡 잠들었다는 걸 알았다. 눈이 부어 잘 떠지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에 쭉 늘어선 의자의 뒷부분이 보였다. 손으로 귀와 목 밑을 더듬자 탄탄한… 왠지 무릎이 느껴졌다.
무릎? 순간, 베고 있는 게 사람 허벅지인 걸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다리의 주인 아이스는 앉은 자세로 눈을 붙이고 있었다. 웅크린 매버릭의 몸 위에 병원 이름이 적힌 담요가 덮여 있었다. 흘러내리지 않게 아이스의 왼쪽 팔이 매버릭의 몸 위에 올라와 손바닥으로 붙잡고 있었다.
매버릭은 후다닥 일어났다. 그가 움직이자 아이스도 눈을 떴다.
뭐라 말 못할 이 어색함.
매버릭이 어, 어…하는 사이 드디어 구스가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매버릭은 튕겨 오르듯 일어나 달려갔다. 여기서 뛰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뒤에서 아이스가 대신 죄송하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니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거죠? 예? 그런 거죠?"
매버릭은 의사에게 몇 번이나 더 집착적으로 물었다. 같은 대답을 반복하다 진이 빠져서 나가는 의료진을 보며 머리와 팔에 붕대를 감은 구스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매브, 아이스맨……나 한 일 년 정도 누워 있었니?"
"여전한 걸 보니 안심이 되는군." 아이스가 말했다.
농담할 기운이 있는 구스를 보며 매버릭은 드디어 웃었다.
아이스는 간단한 안부 대화와 교관에게서의 메시지를 전한 뒤 둘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먼저 나가주었다. 다음으로 캐롤과 브래들리가 왔을 때 매버릭은 좀 더 머물다 셋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창 너머로 안도의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브래드쇼 가족의 모습을 보며 문을 닫았다. 거의 노숙에 가까운 생활을 하느라 구겨진 카키색 근무복을 펴며 병동을 나오는데 로비에 긴 다리가 앉아있었다.
"관사로 갈 거라면 태워주지."
노을조차 끝나고 가로등엔 불이 들어와 있었다. 매버릭은 자신의 가와사키가 관사 주차장에 얌전히 잠들어있다는 걸 떠올렸다. 당연히 그걸 몰고 돌아다닐 정신이 아니었다. 운전할 수 있는 기분도 아니었고.
"응. 고마워."
아이스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중령님이 빌려주신 거야."
둘은 앞 좌석에 나란히 탔다. 바이퍼 중령의 차는 뚜껑이 제대로 붙어있었고, 뒷좌석에는 누군가의 인형과 분홍색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가 있었다.
"가는 길에 뭐라도 먹는 게 어때." 아이스가 물었다. 족히 열시간은 병원에 있었다. 매버릭은 아마 더.
"됐어."
그때였다. 조용한 차 안에 울리는 꼬르륵 소리. 쿠르릉 콰르릉 천둥처럼 몇 절을 거듭해 길고 길게도 매버릭의 구깃한 근무복 안쪽에서 들렸다.
매버릭이 팔로 배를 가렸다. 젠장. 구스라면 여기서 '미라마에 폭풍이 오는구나.' 정도로 넘겨줬을 텐데, 옆에 앉은 아이스는 표정 변화도 없이 저를 보고 있었다.
"이건……."
천하의 매버릭도 얼굴이 붉어졌다.
"오는 길에 보니 근처에 다이너가 하나 있더군. 거기라면 문을 열었을 거야."
아이스가 차분하게 말하며 시동을 걸었다.
"나도 배가 고파서 뭘 좀 먹어야 할 거 같아."
그리고 웃었다. 부드럽게.
둘은 빨간색 의자와 크림색 사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음식 냄새를 맡자 검정과 흰색 타일로 요란하게 꾸민 바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클럽 샌드위치, 팬케이크, 치킨, 양송이가 들어간 수프, 오렌지 주스 등을 닥치고 주문했다.
매버릭은 치즈가 들어간 버거를 한 손에 쥐고 볼이 미어지도록 입에 넣으며 다른 손으로는 수프를 떠먹었다. 그러다가 음료도 마셨다. 아무튼 손이 세 개인 사람처럼 움직이며, 길고 긴 허기를 채웠다.
아이스는 그를 보며 샌드위치를 베어 물다가 걱정이 됐다. 며칠 굶은 위장에 저렇게 넣어도 괜찮나. 그러다가도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어린애처럼 핥으며 맛있게 먹는 매버릭을 보자 제 걱정이 하찮아져서 웃었다.
주스 잔을 만지작거리던 아이스가 입을 열었다.
"다트를 하던 날 말인데."
"엉? 아으?"
"사실 동등한 조건이 아니었어."
"으엄?"
"예전에 연습을 좀 했어. 그럴 일이 있었거든. 슬라이더한테는 말하지 않았지. 그는 내가 처음부터 잘하는 줄 알아."
매버릭이 볼주머니를 부풀린 다람쥐 같은 얼굴로 동작을 멈췄다.
"그날…어떤 기준에 집착하는 네 모습에서 날 떠올렸던 거야. 내게도 그런 면이 있거든."
너처럼 행동한 적이 없었던 게 아니야. 아이스는 평소보다 약간은 머뭇거렸고, 느리지만 진실한 말투로 얘기했다.
"너한테 상처를 주려는 건 아니었다."
눈치가 없는 매버릭이라도 이게 진심 어린 사과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매버릭이 도대체 그의 콜사인이 왜 아이스맨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점원이 아이스크림을 얹은 브라우니를 들고 왔다. 어어, 둘은 재빨리 그릇을 치워 자리를 만들었다. 접시는 매버릭 앞에 놓였다. 아이스는 식사와 디저트 메뉴를 같이 먹는 그가 신기했지만 주문하도록 놔뒀다.
둘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따뜻한 초콜릿 부분에 아이스크림이 닿아 녹고 있다. 매버릭은 수저로 브라우니를 자르면서 위에 얹은 아이스크림을 같이 떴다. 차가운 층, 녹아서 브라우니를 촉촉하게 만드는 층이 다 어우러져야 맛있다. 그래서 이 메뉴는 항상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먹고 만다.
아이스는 제 나쁜 점을 회피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싫은 점이……싫은 거다. 매버릭은 슬슬 이걸 인정해야 할 때가 됐음을 느꼈다.
"배구 했던 날, 네 말이 맞아."
데이트가 정말 중요했다면 그 판을 시작하기 전에 출발했어야 했다. 이기는 것에 집착해서 한 판만 더, 한 판만 더 하다가 한참 늦었다. 이미 그 시점에서 데이트에 갈 태도가 아니었던 거다.
"그러고 갔지만 결국 차였어. 구스한테 아직 말 안 했고. 하기 싫다는 노래까지 시켰는데…. 젠장, 화장실까지 따라갔는데."
"구스에게 더 잘해야겠군."
"응."
"그런데 화장실이라니?"
"……그런 게 있어." 매버릭이 커다란 눈을 굴리며 답을 피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밤이었다. 관사 앞에 도착한 아이스가 매버릭을 먼저 내려주었다.
"내일 중령님이 쓰시게 다른 주차장에 두고 와야 해."
"고마워. 저녁도 잘 먹었어."
공군 녀석들 활주로만큼이나 긴 영수증은 아이스가 계산했다. 매버릭은 보조석 문을 닫기 전에 물었다.
"아이스, 내일 저녁에도 면회 갈 거야?"
"내일?"
"구스는…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해."
"그럼 내일은 다른 녀석들도 같이 가지."
"눈 가리고 다트 한 가운데 꽂는 거 나중에 브래들리한테도 보여줘. 엄청 좋아할걸."
"그래."
아이스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잘 자라, 매버릭……오늘은."
문을 닫자 천천히 차가 움직였다.
매버릭은 생각했다. 나도 잘 자라는 인사를 해줄걸.
아이스라고 잘 잤을까? 그는 오늘 아이스의 안색이 어땠는지, 사고 후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런 걸 살필 여유가 없었다. 제 감정만으로 바빠서.
하지만 저는 별생각 없이 지나갔던 날의 일을 계속 품고 있다가 사과한 게 아이스다.
심장이 쪼그라들 정도로 차가운 바다에서 온 힘을 다해 구스를 붙들었을 때. 그렇게 하면 지상에 그를 붙잡아놓을 수 있을 거라 믿을 정도로 절박했을 때. 피트 미첼의 무언가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제 후회할 일을 해선 안 된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매버릭은 달리고 있었다. 아직 속도가 붙지 않은 차를 따라붙어 탕탕 쳤다.
야! 아이스! 카잔스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아이스가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맙소사, 무슨 일이야 매버릭?"
"너도!"
매버릭이 창문에 철썩 달라붙으며 외쳤다.
"잘 자라고! 아이스 너도!"
"넌 정말……."
아이스가 고개를 저으며 웃는 게 보였다. 매버릭도 땀을 닦으며 웃었다.
"내일 보자, 아이스."
"내일 보자, 미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