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t - gravity
매버릭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을 하고 연애를 시작하더라도 내 모든 게 변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 어쩌면 그는 아이스가 제 구원자가 되어줄 거라 막연히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매버릭과 아이스가 서로를 사랑함에 있어 부족함을 의미하는 게 아니란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다만 매버릭은 여전히 불안했고 스스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에 종종 아이스가 없는 밤은 쌓인 생각에 짓눌려 질식할 것 같았다.
gravity
아이스가 그 말을 들은 건 우연이었다. 불콰하게 취한 사람들 사이에서 지난밤 원나잇 상대가 어땠는지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그 남자의 말이 들린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뺨에 시퍼런 멍자국을 단 남자는 그 상대가 얼마나 '죽여줬는지' 침을 튀겨 가며 설명하고 있었는데 체모 한 올 한 올까지 묘사하는 모습에 아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옆에서 함께 그 말을 들은 슬라이더는 매버릭 그 녀석 상대를 잘못 골랐군 정도의 말을 하려다 차게 식은 아이스의 표정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모욕당한 동료에 대한 불쾌함을 넘어선 아이스의 모습에 슬라이더는 언제부터 너희 그런 사이가 되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는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슬라이더는 어쩌다 둘이 만나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건 차차 물어보고 우선 곧 일어날 소동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매버릭은 아이스와의 연애를 시작했지만 그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매버릭은 사랑받는 데에 익숙하지 않아 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했다. 지금까지 매버릭은 가벼운 연애만 해왔기에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다만 매버릭은 "나는 이런 게 익숙하지 않아서 네가 날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종종 불안해."라는 말을 할 위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꾸만 이상한 방법으로 아이스의 사랑을 확인하려 들었다.
매버릭은 아이스의 여유 넘치는 태도에 이끌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모습에 더욱 조급해지곤 했다. 매버릭에겐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은 아이스가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하고 여유가 없는데 아이스는 능숙해 보였다. 뭐든지. 그래서 매버릭은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만 아이스를 긁곤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줄 거야? 비틀린 표출이었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걸 알면서도 매버릭은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도가 심해질수록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않는 아이스가 오히려 더 야속해졌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넌 아무렇지도 않아?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건강하지 못한 생각인 건 알고 있었으나 매버릭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사고는 점점 극단으로 치달아 내가 다른 남자랑 해도 아이스는 아무렇지도 않을까? 까지 흘러갔다. 맨정신이었다면 생각으로 끝냈겠으나 밤새 매버릭의 고민을 들어준 술은 당장 실행하자며 매버릭을 부추겼다.
충동적으로 술집으로 달려간 매버릭은 대충 추파를 던지는 남자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와 잘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이스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나 다른 사람이랑 잤어. 그래도 넌 아무렇지도 않아? 한편으로는 아이스가 이번에도 별 반응이 없다면 어쩌지,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며 두려웠다. 남자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이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매버릭은 자신의 옷을 벗기려 드는 남자의 낯선 손길에 정신이 들었다. 머리까지 치고 올라온 불쾌함에 매버릭은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 한 건가 깨닫고 남자를 밀어냈다. 미안하지만 다른 상대를 알아보는 게 좋겠단 매버릭의 말에 남자는 열이 받은 듯 강제로 매버릭의 위로 올라왔다. 하필 골라도 질 나쁜 인간을 골랐냐며 매버릭은 한탄하며 벗어나려 버둥댔다. 매버릭은 결국 옆구리에 멍자국을 달고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매버릭은 내가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허탈했다.
매버릭은 늦은 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아해하며 문을 열어보니 아이스가 서 있었다. 달을 등진 아이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이스?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보고 싶어서 왔지 매브."
아이스는 연락 없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올 사람이 아니었다. 매버릭은 아이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 확신했다. 우선 아이스를 안으로 들인 매버릭은 마실 걸 가져오며 아이스의 상태를 슬쩍 살폈다. 아이스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여상해 보이면서도 차갑게 가라앉은 것 같기도 했다.
"아이스, 무슨 일 있어?"
매버릭의 조심스런 물음에 아이스는 가만히 매버릭을 바라봤다. 선명한 녹안이 보였다. 컵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매브."
"응. 말해."
"네 시험을 어디까지 받아줘야 해?"
담담한 아이스의 말에 매버릭은 굳어버렸다. 그의 행동에 아이스가 화를 내면 냈지 제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매버릭을 보며 아이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매브 넌 내가 널 모른다고 생각해? 넌 지금 내가 너에게 실망해서 떠나길 은근히 바라고 있잖아."
내가 그랬다고? 매버릭은 전혀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걸 바란 거였나?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넌 오히려 안도하겠지. 역시 이렇게 될 거였다고, 처음부터 엉망이 될 줄 알았다고. 더 깊게 사랑하기 전에 끝나서 다행이라 여기겠지. 차라리 난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익숙할 네 자학도."
"…."
"그 편이 네게 더 쉽다는 거 이해해. 아직 매브 너에겐 모든 걸 내려놓고 날 사랑하기 두렵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매버릭은 꿀꺽 침을 삼키고 아이스를 바라보다 아이스가 말을 고르자 시선을 피했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어젯밤 제가 저지른 죄가 있어 몹시 긴장됐다. 어떻게 알아낸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저가 다른 사람과 잤다는 걸 들은 것 같은데, 면목이 없었다. 최악의 연인이 아닌가.
많이… 화났겠지.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번엔 선을 넘었다고 하려나. 매버릭은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매브, 난 널 놓아줄 생각이 없어."
아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매버릭은 흠칫 놀라 고갤 들고 아이스를 바라봤다. 옅은 회안이 저를 꿰뚫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여유있어 보이던 그의 눈이 자글자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매버릭은 사랑이란 어쩌면 중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지구에서 떨어지지 않게 서로를 붙잡아주는 인력. 그 보이지 않는 힘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서서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다만 그는 때때로 그 혼자만 중력이 약한 것처럼 느꼈다. 땅에 서있는데도 어쩐지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전투기를 모는 해군 조종사였으나 그의 지난 삶을 반추해보면 우주비행사가 더 가까운 표현이었다. 매버릭이 갈구했던 애정은 멀리서 빛나는 별처럼 찬란하되 손에 닿지 않아 무중력 속에서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 채 홀로 유영해왔다.
매버릭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를 떠나갔다. 그럴 때마다 그를 붙잡는 끈이 하나씩 사라졌다. 그를 끌어당기는 힘이 약해질수록 두려웠다. 이러다 영원히 고독 속을 표류하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잠들지 못하는 밤이 하나 둘 쌓여갔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다.
매버릭은 아이스의 눈에서 뜨거운 욕망을 마주했다. 지금껏 아이스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광기어린 열기였다. 아이스는 더 이상 말이 없었으나 그의 눈빛은 수많은 욕망을 함축해 언어 대신 매버릭에게 슬쩍 전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이걸 지금까지 숨겨왔었다고. 매버릭을 샅샅이 핥아내리는 시선이 진득했다.
"매브."
"…응."
"아직도 내가 널 떠나버릴까봐 두려워?"
매버릭은 처음으로 아이스 또한 어딘가 뒤틀려있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언제나 다정하고 침착했던 아이스는-물론 그 모습 또한 아이스의 진심인 건 알고 있다- 사실 매버릭에게 강하게 집착하고 그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버릭은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웠다.
매버릭은 자신을 강하게 붙잡아줄 사람을 원했다. 자꾸만 멀어지는 자신을 이 땅에 발을 붙이게 해줄 수 있길 바랐다. 자신에게도 끈이 생기기를, 열망해왔다.
"날 믿어 매브. 나는 널 떠나지 않아. 네가 날 떠나고 싶어해도 말이지."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그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아이스."
"그럼 이젠 슬슬 착륙하지 그래?"
어느새 차는 다 식었다.
"내가 네 돌아올 곳이 될 수 있게 해줘."
해무 속을 헤매이며 간절히 붙잡고 싶었던 빛이 보였다. 매버릭은 식어버린 컵을 내려놓고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달빛에 예쁘게 빛나는 금발이 있었다. 드디어 손아귀에 쥔 빛은 부드러웠다.
아이스도 컵을 놓고 매버릭을 끌어당겨 그의 위에 올라갔다. 매버릭이 알게 되면 달아날까 지금껏 숨겨왔던 욕망이 어쩌면 매버릭이 원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 알려줘도 될지 아직은 모르는 일이었다. 이건 앞으로 서서히 알려줘야지. 네 애인은 네가 나는 하늘마저 질투하고 있다고.
결국 매버릭은 옆구리의 멍을 들키고 말았다. 아이스가 조용히 주먹을 쥐는 걸 보고 매버릭은 서둘러 해명하고-자신이 더 많이 때렸다는 것도 최대한 어필했다- 아이스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아이스는 매버릭에게 화를 내는 대신 조금 더 강하게 그를 껴안았다. 매버릭 또한 더 이상의 사과 대신 그를 끌어안았다.
둘은 그렇게 끌어안은 채로 잠에 들었다.
아이스가 잠들자 매버릭은 가만히 눈을 떴다. 숨소리와 초침소리만 들려오는 조용한 밤이었다. 맞닿은 살갗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한없이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잠든 아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다 매버릭은 눈을 감았다. 느껴지는 숨결의 무게가, 자신을 안고 있는 아이스의 무게가,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의 무게가, 포근한 공기의 무게가, 조금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세상이 그를 조금 더 붙잡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