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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싯돌 - 사랑인 걸까?

모두가 잠든 한밤중, 복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카잔스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저 까맣고 동그란 머리통은 분명 피트 미첼이었으니까. 도대체 이 한밤중에 저기서 왜 저러고 있는 거야? 설마 술에 취해 잠이 든 건가? 제 기준으로는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 중 하나였지만,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다 못해 그 위로 비행하는 미첼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저러고 있다가 상관에게 걸려서 기합을 받든 영창을 가든 내버려 두자는 심정으로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시작한 카잔스키였다. 그러나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곤 멈추어 선다. 아니, 멈춰 선 것도 모자라서 몸을 돌려 미첼에게 다가갔다. 이상하게도 언젠가부터 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피트 미첼이 신경 쓰였다. 이러한 연유로 일분도 채 유지하지 못한 [내 알 바 아님.]이라는 쿨한 태도를 접고선, 미첼의 코앞까지 다가간 카잔스키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매버릭."


당연히 대답이 없다. 대체 술을 얼마나 퍼마셨으면 사람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나 싶어, 카잔스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선 미첼의 어깨를 흔들며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이봐, 매버릭."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약간의 짜증과 그보다 짙은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제서야 축 처져있던 미첼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어?"


미첼이 고개를 든 순간, 카잔스키는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곤 속으로 그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미첼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닌, 누가 봐도 몸이 안 좋아서 다 죽어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니까. 열이 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충혈된 눈,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에 인후통 때문인지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얼굴이 구겨지는 건 기본이었고, 주기적으로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을 하고선 무슨 일이냐며 자신을 올려다보는데, 카잔스키는 답지 않게 당황해야만 했다.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늘 기력 넘치는 모습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천둥벌거숭이가 아파서 골골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기에 카잔스키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매버릭, 너......괜찮아?"
"응? 뭐가......"
"뭐라니? 어디 아파?"
"아......나 가끔 이래."


일이 년에 한 번씩 이렇게......컨디션이 안 좋을 때가 있어. 그냥 자고 나면 나아. 딱 봐도 컨디션이 안 좋다는 가벼운 말로 넘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곤 기침을 해대는 미첼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카잔스키였다. 다 죽어가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고 짜증을 내려던 그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미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던 브래드쇼......원통할만큼 세상을 빨리 등진 전우의 말이 생각났다. 


탑건을 다니던 시절, 사사건건 미첼과 부딪히는 자신을 브래드쇼가 할 말이 있다며 불러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매브 말이야. 네 생각처럼 마냥 나쁘기만 한 놈인 건 아니야. 물론 네 눈에 그 녀석이 얼마나 거슬릴지 짐작은 가.] 이렇게 말하는 브래드쇼의 눈엔 보호자의 그것과 비슷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이어진 브래드쇼의 설명에 따르면, 미첼은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신 데다가 형제도 없어서 늘 혼자였단다. 정붙일 곳도 의지할 곳도 없이 늘 외롭게 살아왔단다. 그러다 보니 강해져야만 했고, 강한 척을 해야 했단다. 모든 걸 혼자서 결정하고 해결해야 했기에, 다소 독선적인데다가 직감을 믿고선 밀어붙이는 경향이 크다고 말하는 브래드쇼였다. 그 사람 좋은 얼굴을 떠올리자 짜증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안타까움이 대신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아무리 아파도 그저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혼자 앓아왔을 미첼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이불로 감고선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라며 잠을 청했을 밤들을 생각하자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기에, 카잔스키는 굳은 얼굴을 하고선 미첼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니나 다를까 이마가 뜨겁다 못해 절절 끓는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놀란 미첼이 뭐 하는 거냐며 제 이마를 짚고 있는 카잔스키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마에 닿아있는 손은 아무리 힘을 줘도 미동조차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카잔스키가 미첼을 부축해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차가운 바닥에 계속 앉아있으면 더 심해져."
"야, 나 괜찮......"
"걷지도 못할 만큼 아픈 주제에 뭐가 괜찮아. 이것 봐. 아주 그냥 비틀비틀......"


몸도 채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는 미첼의 허리를 끌어안고선 팔을 어깨에 둘러메 부축하자, 거칠고 가쁜 숨소리가 카잔스키의 귓가에 생생히 들려왔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실상은 매우 힘든 듯 미간엔 주름이 잡혀있었고, 한기가 들어 덜덜 떨리는 몸은 땀투성이였다. 미첼이 상비약을 가지고 있을 확률은 극도로 낮았기에, 일단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는 카잔스키였다. 

 

 


방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미첼의 몸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저에게 부축을 받으며 거친 숨을 쌕쌕 몰아쉬고 있는 모습에 카잔스키는 걱정스런 얼굴로 응급실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번에 병원은 싫다는 말이 돌아온다.


"......싫어. 병원은......진짜 싫어."


가서 좋았던 적이 없었어. 그 말은 아마도 브래드쇼와 그보다 훨씬 전......아버지를 따라가듯 세상을 떠난 어머님 때문에 나온 말이리라. 아파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병원은 싫다며 연거푸 말하는 미첼의 모습에, 카잔스키는 한숨을 내쉬곤 알았다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미첼의 다리가 점점 무거워진다 싶더니,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까무러치듯 쓰러지고야 만다. 카잔스키의 계획은 가지고 있는 약을 먹인 뒤, 미첼을 방까지 데려다주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제 방에서 그를 재우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카잔스키는 일단 미첼의 항공 점퍼와 신발을 벗긴 다음, 그를 들다시피 해 제 침대에 눕혔다. 식은땀에 축축해진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올리자, 괴로운 듯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새어 나온다. 카잔스키는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제 짐을 뒤적여 여러 가지 상비약을 꺼냈다. 대충 눈으로 증상을 파악해 그에 맞는 약을 꺼내어보니, 큰 손바닥 위에 놓인 알약의 개수가 여덟 개나 되었다. 생수병과 약을 들고선 침대 옆으로 다가온 카잔스키가 "매버릭."하고 불러보았지만, 정신없이 앓고 있는 미첼의 귀엔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매버릭, 내 말 들려? 약 먹을 수 있겠어?"


대답 대신 끙끙 앓는 소리만 들려온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알약을 하나 밀어 넣곤 물을 조금 마시게 해보았지만, 약을 삼키긴커녕 물이 입가로 다 새는 걸 보고선 카잔스키의 얼굴 위로 난처한 빛이 점점 진해졌다. 쌕쌕 소리를 내며 앓는, 고통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카잔스키의 입술 사이로 결국 혼잣말이 새어 나온다.


"......매버릭, 화내지 마."


이것 말곤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래. 이렇게 말하곤 알약 두 개를 제 혀 위에 올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미첼에게 입을 맞춰 제 입 안에 들어있는 약을 먹이는 카잔스키였다. 미첼의 목울대를 엄지로 쓸면서 그가 약을 완전히 삼켰는지 확인한 다음,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은 알약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이 행위를 반복했다. 마지막 알약을 미첼이 삼키자 서로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고, 카잔스키는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약을 먹이기 위해서였다곤 하지만, 미첼은 카잔스키가 저에게 입을 맞춘 것도 모른 채로 그저 앓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카잔스키는 곧바로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얇은 수건을 찬물에 적셔서 미첼의 이마 위에 올려놓았고, 땀범벅인 얼굴과 목 주변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주었다. 그렇게 어서 빨리 약 기운이 돌기를 바라며, 정성스레 미첼을 간호했다. 


생각해보면 놀랄 일이었다. 며칠 전, 임무 수행을 위해 일 년 전 졸업한 탑건으로 다시 모였을 때만 해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미첼을 간호하게 될 줄 몰랐으니까. 그것도 지극정성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애초에 친하지도 않았다. 분명 졸업 직후에 있었던 극적이고도 감동적인 순간을 함께한 건 맞았지만, 사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 카잔스키는 원래 소속되어있던 부대로 돌아갔고, 미첼은 탑건 교관으로 발령이 났다. 그마저도 오래 하질 못해서 두 달 만에 교관직을 내려놓곤 탑건을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매버릭은......그녀석은 여전하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하곤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매버릭은......미첼은 이제 괜찮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본 그는 브래드쇼의 죽음을 어느 정도 떨쳐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 년 만에 재회한 미첼은 카잔스키의 생각과는 달리 애써 쾌활한 척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브래드쇼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족처럼 지내던 RIO를 잃고 일 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미첼은 한층 더 외로워 보였고, 말수도 조금은 준 것 같았다. 뭐......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태도야 여전했지만, 그에게서 언뜻언뜻 비치는 그늘이 어쩐지 카잔스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외로워 보이는 얼굴이 보기 싫었다. 쓸쓸해 보이는 얼굴이 보기 싫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카잔스키는 저 자신에게 몹시 놀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미첼이 신경 쓰였다. 


약 기운이 조금씩 도는 건지 숨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확인하고선, 카잔스키는 오전에 있을 훈련을 위해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난 그때, 힘이라곤 없는 미첼의 손이 카잔스키의 손목을 잡아 온다. 땀에 젖어 축축한 손은 잘게 떨고 있었고, 눈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마, 구스."
"......"
"......가지 마."


그 말에 방금까지 쏟아지던 졸음이 달아났다. 미첼의 손엔 여전히 힘이라곤 실려있지 않았기에, 제 손목을 잡은 손을 살며시 떼어내곤 자러 갈 수도 있었지만......그러지 않는다. 카잔스키는 의자에 도로 앉으며 미첼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리곤 홀린 듯 중얼거린다. "안 갈게. 걱정 마."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은 건지, 안도하듯 미첼의 숨소리가 편안해졌다. 


미첼이 눈을 뜬 건, 창문 밖으로 푸르스름한 밝음이 막 밀려오는 새벽이었다. 죽을 것 같이 아파오던 몸은 어쩐지 조금은 가벼워졌고, 깨질 것 같은 두통도 사라져 있었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려던 그때, 침대맡에 엎드려있는 남자 때문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를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카잔스키가 제 침대맡에서 엎드려 자고 있다니......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손까지 맞잡고 있었기에 몸을 일으키면서 황급히 잡혀있는 손을 빼냈다. 그 덕에 엎드려있던 카잔스키 또한 잠에서 깼다. 다짜고짜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물으려 했지만, 그와 동시에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촤르륵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도 그렇고, 낯선 주변도 그렇고, 제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끙끙 앓다가 쓰러져버린 저를 카잔스키가 밤새 곁을 지키며 간호해준 모양이었다. 속이 비어있는 약봉지와 젖어있는 수건, 비어있는 생수병 그리고 무엇보다 피곤해 보이는 카잔스키의 얼굴이 그 증거였다. 그럼 여긴 아이스의 방인 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물게 부스스한 모습을 한 카잔스키가 몸은 이제 좀 괜찮냐고 물어온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고개만 천천히 끄덕이는 미첼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카잔스키가 커다란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나간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카잔스키의 손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머그잔과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아직도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해 멍하니 있는 미첼에게 카잔스키는 약봉지를 뒤적여 꺼낸 알약들과 물이 가득 찬 생수병을 건네며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약부터 먹어."


그 말에 미첼은 고분고분 약을 받아 입안에 털어놓고선, 생수병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꽤 많은 양의 알약을 한 번에 삼키려니 목에 걸리는 느낌도 들었지만, 병을 다 비울 기세로 물을 마시자 전부 다 무리 없이 넘어갔다. 입가에 묻은 물을 손등으로 닦는데, 카잔스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머그잔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다. 


"페퍼민트 차야. 감기에 좋으니까 웬만하면 다 마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조금은 피로해 보이는 얼굴로 내뱉는 말이 묘하게 다정해서 어쩐지 낯이 뜨거워졌기에, 미첼은 부러 기침을 몇 번 하곤 머그잔에 든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뭐야, 이거. 치약 맛이잖아."


얼굴을 구기며 치약이라 말하는 미첼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카잔스키의 얼굴 위로 웃음이 번진다. 더는 안 마시려나 싶어 빤히 쳐다보니 기껏 챙겨준 걸 못 마시겠다며 내려놓긴 미안했던 모양인지, 머그잔을 감싸 쥐곤 몇 모금 더 마셔보는 미첼의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밤새 옆에 있었던 거야?"
"응. 누가 손을 잡고 안 놔주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


반은 진담인 농담에 대번 표정이 샐쭉해진다. 스스로도 놀랄법한 일이었지만 샐쭉한 얼굴을 해 보이는 것도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볼멘소리가 미첼의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웃기지 마. 내가 네 손을 왜 잡아?"
"......잡았는데?"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언제나 그렇듯 불리한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말문을 돌린 것까진 좋았는데, 기세 좋게 외친 것과는 달리 뚝 하고 미첼의 목소리가 끊겼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차분한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미첼이 드물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카잔스키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아닌가? 입을 열었다가 다물고, 또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말고......이러한 행동이 몇 번이나 반복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을 정도였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지켜보는 사람의 진을 빼놓을 기세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미첼의 입에서 드디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웠던 건가? 고민한 것에 비하면 너무나 짧고 간단한 그 말에 카잔스키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고마우면 다음에 커피나 한잔 사."
"아니, 그게 아니라!"
"......?"
"물론 오늘도 고맙지만......"
"......"
"구스 일......유감이라고 위로해준 거 고마워."


아......이번엔 카잔스키가 놀랄 차례였다. 생각지도 못한 감사에 눈을 조금 크게 뜬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첼은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선 말을 이었다. 


"......그때 솔직히 힘이 많이 됐어. 언젠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거든. 고마웠어."


사실 쑥스러워서 평생 안 하려고 했는데, 아파서 그런지 마음이 약해지네. 그 말에 미첼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지만 않았다면, 카잔스키는 분명 제 가슴 부근에 슬며시 손을 대보았을 것이다. 고마웠다는 그 말에 생전 느껴보지 못한 울렁임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온다. 이 감정을 무어라 표현할 단어가 바로 생각나진 않았기에, 카잔스키는 순식간에 복잡해진 머릿속과 마음을 정리하려고 깊게 숨을 내쉬어야 했다. 그리곤 밤새 앓아 핼쑥해진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유감이었으니까."
"......응."
"......구스는 정말 좋은 녀석이었어."
"......응."


눈물이 날 것만 같았는지, 킁! 소리를 내곤 머그잔에 담겨있는 차-자신이 좀 전까지 치약이라고 말한-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미첼이었다. 차가 어느 정도 식은 상태라 다행이었다. 그렇게 잔을 깔끔하게 비우곤 미첼은 애써 활기찬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아무튼 밤새 간호해준 것도 고마워. 다음에 네가 아프면 나도 간호해줄게."
"너 상비약 같은 거 들고 다녀?"
"......아니."
"......그런 애가 무슨 남을 간호해. 심지어 자기가 아픈 것도 몰랐으면서."


그 말에 미첼은 대번 얼굴을 구기며 툴툴거린다. 이 재수 없는 놈이......


"간호해준다고 해도 난리야......그래, 너 잘났다."
"잘난 거 알면 보고 좀 배워."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뭐야, 잘난 척이나 하고......넌 평생 아프지 마라. 어디 아프기만 해봐."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네,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카잔스키였다. 그러자 분통 터진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미첼 또한 받아칠 말이 없는지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인다. 제 방으로 돌아가겠다는 미첼을 아직 다 나은 거 아니니 한숨 더 자라며 도로 눕히곤, 카잔스키는 잠시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구석에 놓여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얇은 담요를 덮고선 소파에 누웠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은 울렁이고 있었다. 
 


고마웠어.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때의 미첼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았다. 땀이 서려 있는 얼굴, 남아있는 잔열로 인해 발간빛을 하고 있는 그 얼굴, 어딘가 힘없는 눈빛......그러나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전하던 그 부드러운 녹색의 눈을 잊고 싶지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만약 미첼이 알게 된다면 주먹을 날릴지도 모르는......약을 먹이기 위해서였다지만 그의 입술과 제 입술이 겹쳐진 그 순간이 떠오른다. 카잔스키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쓸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울렁이고 있는 이 감정이 어떠한 것인지 여전히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다는 게, 카잔스키의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일단은 미첼의 몸이 완전히 낫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며, 카잔스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실 지금 이 순간 그 외의 다른 건 중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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