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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슬린 - 자유죽음

※ 자살 소재 포함

자유죽음: Freitod

 

햇빛과 번개와 빗방울을 참으로 많이 맞았을 오래된 돌로 지어진 성당의 문은 반만 열려 있었다. 이곳이 닫혀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지만, 동시에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릴 정도의 수고로움은 발휘해야 들어갈 수 있는 그 미묘한 빈틈을 미첼은 조용히 파고들었다. 석양이 완전히 사라져야만 불을 켜겠다는 검소한 어둠은 도리어 따스했다. 미첼은 중앙에 늘어서 있는 긴 의자를 전부 지나쳐 왼쪽으로 치우쳐 걸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도 받아주시나요."


미첼은 고해실 입구 앞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새어나오는 촛불 빛이 흔들렸다.


"물론입니다. 들어오시지요."


미첼은 낮고 작은 계단 3칸을 올라 딱 사람 한 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 좁고 반추적인 고해실 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무로 촘촘하게 만든 무늬가 건너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거의 알아보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었다. 오직 질식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뚫려 있는 작은 환풍구에서 양초 타는 냄새와 바깥의 공기가 어우러지고 있었다. 미첼은 문을 닫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신부님, 제가 유령에게 죽음을 빌었습니다."


미첼은 자리에 앉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신부의 응답은 조금 늦게 들려왔다.


"…말씀해 보십시오."
"며칠 전에 저는 제 벗의 유령을 만났습니다."


아이스는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의 습기가 섞이지 않은 맑고 서늘한 대기가 집집마다 걸려 있는 주황색 불빛을 흔들고 다녔다. 아이스는 자신의 차림을 살폈다. 그는 자신이 너무 낡아서 버렸던 짧은 코트를 입었고, 매버릭이 지금까지 자기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산 선물 가운데 가장 비싼 거라며 본인이 더 으쓱거렸던 캐시미어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이제 아이스는 정면을 보았다. 낮은 울타리가 세워진 대문의 양쪽 기둥에는 대충 감아 놓은 꼬마 전구와 박쥐 장식 하나, 그리고 호박 모양의 바구니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아이스는 그 안쪽에 세워져 있는 고급스러운 오토바이에 더욱 눈길이 갔다.


아이스는 꽤 오래 그 자리에 서서 생각했다. 자신의 허리밖에 오지 않는 그 간소한 문을 밀어야 하는 건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아이스가 확실히 아는 것은, 아마 눈앞에 보이는 집에 있을 누군가를 자신이 무척 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톰 카잔스키의 1주기가 다가오고 있던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저는 대문에 걸어 두었던 사탕이 다 떨어져서 아이들이 먹을 걸 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줄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애들의 노크 소리치고는 상당히 깔끔했었네요. 하지만 핼러윈에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걸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 앞에 서 있는 그를 보았을 때… 반사적으로 울었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 모습도 아니고, 하필 그가 대령이었을 때로 나타났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그가 대령이었던 시점은 언제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저 때문에 가장 힘들었을 시기거든요. 아직도 소령에서 맴도는 동기가 사고치는 것도 수습하기 바쁜데, 최초의 별을 다는 건 정말로 어려웠을 겁니다. 어쨌든 영관급에서 군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과 제독으로서 전역하는 일 사이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대령끼리의 경쟁은 특히 심한 편이죠. 물론 그는 저에게 그런 점을 결코 내보인 적은 없지만."


미첼이 내심 가장 미안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 아이스는 미첼이 정말 좋아했던 목소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전부터 너는 어쩌면 목소리가 그렇게 신사적이고 듣기 좋냐고 부러워했던 음색이 기적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었을 때 미첼은 곧바로 눈물을 흘렸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맞이하는 게 아니라 죽은 자가 산 자를 안아주었다. 


"사실 저는 무시무시한 악령 얘기를 많이 듣고 살았습니다. 바다 위에서는 그런 괴담이 유희로라도 돌기 쉬운 법이니까요. 그런데 그는… 아마 그만의 특성이겠죠. 제가 어느 정도 달래지고 나자 제가 집에 어떤 사진들을 놔두고 사는지 살피더군요. 아직도 제가 죽었거나 다른 이유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사진만 보고 사는지 알아보려고 말입니다."
"…정말 좋은 친구분이로군요."
"그는 제 삶에서 만난 최고로 좋은 것 모두를 상징하죠."

미첼은 아이스가 임무를 성공한 뒤 항공모함의 갑판 위에서 루스터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안도하며 웃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페니와 아멜리아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거의 기뻐했다. 그는 미첼이 예상 외로 자신의 사진을 다른 것과 같이 세워두지 않은 사실엔 별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혹은 굳이 짚어내지 않았거나. 하지만 미첼은 말하고 싶었다.


"네 사진은 내 침대 옆에 있어. 수면제와 함께."


아이스의 희생적인 얼굴이 미첼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와준 거 아니야? 이젠 내가 널 따라가도 된다고 허락해주러 온 거 아니냐고."


아이스가 미첼에게 다가왔다. 미첼은 마치 제독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여전히 대령이었다. 아이스는 자신보다 결코 지위가 높았던 적이 없고, 자신이 믿기에 언제나 자신보다 더 많이 슬퍼하는 미첼의 어깨를 살짝 잡아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너의 죽음을 바랄 리가 없잖아."


미첼의 초록색 눈동자가 다시금 아이스의 관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글썽거렸다. 그렇듯 미첼은 언제라도 자신이 조종사 배지를 꽂아준 톰 카잔스키의 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1년이면 많이 버텼다고 생각해. 이제 그만 내가 선택하게 해줘."
"아직도 네 선택은 너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기만 하구나."
"…가장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사람만 할 수 있는 선택이지." 


아이스의 첫 번째 기일이 다가오자 미첼은 페니와 루스터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런 시기에 미첼을 혼자 놔둘 심성이 아닌 그들이 지금 그의 곁에 없는 이유였다. 미첼은 두 사람을 모두 좋아하고 아꼈지만 그들은 아이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정원사가 최후에 얼마나 큰 노력을 쏟아붓고 갔다 한들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정원은 종국엔 시들 수밖에 없었다.


"구스가 죽고 나서도 36년, 아니, 37년을 버텼잖아."
"그 36년 동안에는 네가 곁에 있었으니까."


미첼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스가 두르고 있는 머플러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아이스에게 좋은 선물을 사주고 싶어서 미첼은 처음으로 의류 명품 매장에 들어갔었더랬다. 미첼은 두 손가락으로 머플러의 섬유를 매만지다가 혼자서 피식 웃었다. 그때 직원은 친구 선물을 사러 왔다는 미첼에게 친구가 어떤 분이시냐고 물어봤는데, 나이대와 취향 정도만 이야기해줘도 괜찮다는 걸 몰랐던 미첼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아이스 자랑을 했었다. 금발에 회색 눈동자가 엄청 신기하고, 롤렉스를 몇 개씩 바꿔 착용하고 다니는 데다 직업적인 부분에서도 엄청 성공 중인 도련님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마지막엔 이런 말까지 덧붙였었다. 정말 중요한 사람이니까 많이 비싸더라도 상관없다고.


아이스는 가만히 미첼을 바라보았다. 그는 구스가 있을 때의 미첼, 그리고 자신이 곁을 지킬 때의 미첼만 보았다. 아이스는 그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벗어난 피트 미첼은 진실로 가련한 형태를 띤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저승사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어떻게든 미첼의 삶을 끄집어냈다.


"이제 네 삶에는 브래들리도 있고 페니도 있어."
"네가 그렇게 만들었지. 마치 네가 떠난 이후의 나를 고려하듯이."
"두 사람을 사랑하잖아."
"맞아. 하지만 그 누구라도 너에게 했듯이 사랑할 수는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미첼."
"아이스, 제발…."


아이스는 씁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미첼을 만났던 방에서, 자신이 루스터 대신 출정해서 죽게 해달라던 그를 막았을 때와 상황이 너무도 겹쳐 보였다. 다만 이제 아이스에겐 미첼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는 더는 살아 있지 않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지속될 수 없는 허망한 포옹은 생전처럼 미첼을 강하게 만들지도 못할 것이었다. 오직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아이스는 미첼을 감싸지 못하고 있었다. 


"순서를 돌려놓는 거라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루스터는 내가 없어도 살 수 있어. 페니는 당연하고. 너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네가 없으면 나는 하늘로 올라갈 이유도, 땅에 내려오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게 된다고."


미첼은 주저앉는 꼴을 보여 아이스를 더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 다리에 계속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를 자유롭게 해줘."


아이스는 길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그 훌륭한 목소리에 옅은 절박함을 담아 말했다. 


"…나는 너를 속박하려 한 적이 없어, 미첼. 네가 살기를 바랐을 뿐이지."
"하지만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내가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잖아."


미첼이 방해받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을 수 있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던 건너편의 신부가 정중하게 미첼의 호흡을 뺏었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미첼의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부가 무거운 숨을 바닥에 띄웠다. 


"이미 당신은 결심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결심을 결코 지지해드릴 수 없는 입장이고요. 그런데도 고해실을 찾아오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땅에 있는 장소 중 여기가 가장 하늘과 가깝다고 판단했거든요. 전투기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지만, 제가 아이스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녹취되는 건 싫었어요. 사실 아이스는 끝까지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저는 종교가 없으니 신부님께서 저를 구제하지 못하셨다고 신이 벌을 내리시진 않으실 겁니다."


신부는 신을 믿지도 않는 이의 제멋대로인 발언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신부는 미첼의 그림자가 얼굴을 닦아내고 촉촉한 숨소리를 말리는 동작을 마무리하길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정말로 그분이 아닌 다른 이를, 그분처럼 사랑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생각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미첼이 가면을 쓴 것처럼 쪼개져 보이는 성직자의 윤곽을 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그가 저를 마중 나와 주겠죠?"
"말씀해주신 거로만 봐도, 그분은 당신을 외면할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라도요."


미첼이 고해실 안에 들어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웃었다. 그는 아이스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친우가 가진 제일 따스한 자질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기뻐했다. 미첼은 신부에게 행복하게 지내시라는 특이한 인사말을 남기고 고해실을 떠났다.


그리고 11월 1일 새벽, 피트 미첼은 그동안 의사에게 처방 받은 모든 향정신성 약물을 모아두고 있던 수면제와 함께 먹었다. 침상 위에 편하게 누워 숨을 내던진 그의 손에는 하늘 위까지 가져가기로 한 작은 소지품처럼 사진 한 장과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루스터에게 내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다고 했어. 그땐 그런 말을 하는 게 당연한 것 같았고, 나도 진심으로 한 얘기였는데… 며칠 지나고 나니 갑자기 깨닫게 되더라고. 내가 그동안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는 걸 말이야. 날 살려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않았던 거지. 너에게도 고맙다는 말은 정말 많이 했는데, 콕 집어서 내 삶과 목숨을 책임져줘서 고맙다고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 너무 늦어버렸지만, 내가 이상하게 너에 대해서는 그렇게 빠르게 행동하지 못했던 사람이잖아. 그러니 한 번만 더 이해해줘.


그리고 나를 살게 해줘서 고마웠어, 아이스.]


그렇게 피트 미첼은 끝내 톰 카잔스키의 1주기를 지상에서 기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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