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 그 이름의 주인
※ 구스 생존 IF
※ 네임버스 AU (상대의 이름이 새겨진 곳에 상대가 접촉할 시, 쾌락을 느끼는 설정)
의식이 몽롱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된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녹는 기분에 매버릭은 달뜬 숨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내뱉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끝내줄 것 같은데. 기대와는 달리 눈이 떠지는 것이 먼저였다.
"Shit."
매버릭의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이것도 제법 익숙해져서 그런가. 매버릭은 더 말을 꺼내는 대신 다 젖어 반투명해진 티셔츠를 대충 벗어 내던지는 것을 택했다. 유려한 글씨가 새겨진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톰 아이스맨 카잔스키. 작지 않은 발바닥에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 부분보다 새겨져 있는 부분이 더 많았다. 쓸데없이 이름은 길어서. 굳이 이런 10대 청소년 때나 겪을 몽정에 가까운 꿈을 꾸는 이유는 간단했다. 구스의 말에 따르면 신체의 발악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네임이 근처에 있으니 빨리 접촉하라는. 하, 그런 것에 순순히 굴복하면 제 콜사인이 매버릭이겠는가.
매버릭이라고 처음부터 짝이라는 것에 환상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가졌으면 가졌지. 항상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던 매버릭에게 네임은 희망이기도 했다. 파일럿이 되었던 이유는 제 아버지도 있었지만, 아이스맨이라는 콜사인을 가진 파일럿을 찾기 위함이기도 했다. 제 발에 새겨진 이름이 아이스맨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던 구스는 아이스맨의 이야기를 가끔씩 해 주었다. 엄청나게 뛰어난 파일럿이랬나. 그때까지만 해도 매버릭은 10대 때도 생각하지 않던 핑크빛 로맨스를 꿈꿨더랬다.
항상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상대가 자신에게 걸어오며 자신이 저의 짝이라며 기쁘게 웃는 모습을. 그 기대는 첫 만남부터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찾았어?"
"뭐를?"
"누가 제일 최고의 파일럿인지."
하, 이래서 파일럿은 안 된다니까. 에고 덩어리 그 자체인 새끼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매버릭은 맥주를 넘기면서 하나의 가능성을 추가했다.
제 짝에게는 제 이름이 없다는.
10만분의 1도 안 되는 확률이니 순전한 가능성이었다. 구스도 이름을 본 것 같지 않다고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매버릭도 이름 같은 게 있을 것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으니. 정말로 아이스맨이 떨려서 아무 말이나 했던 걸 수도 있잖아?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고 계속해서 훈련하는 매버릭에게 아이스맨은 아예 폭탄을 투하했다.
"너는 너무 위험해. 도대체 누구 편이지?"
아, 저 새끼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무슨 말을 하고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구스가 원래 그런 놈은 아니라고 달래 주려고 했지만, 매버릭의 사고 회로는 이미 영 좋지 않은 곳으로 회전한 지 오래였다.
아이스맨에게는 제 이름이 없다는 생각을 매버릭의 뇌에서 멋대로 기정사실로 굳힘과 동시에 엄청난 자기합리화가 시작되었다. 저런 딱딱하고 재미없는 인간과 짝이랍시고 평생을 묶여 사는 것은 저도 딱 질색이다. 따위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매일 아침 열에 달떠 일어나는 것은 달갑지 않았지만, 아이스맨에게 내 몸에 네 이름이 있으며 너와 나는 운명이라고 말하느니 혀 깨물고 죽는 게 나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이 아이스맨과 보는 마지막 날이란 사실이었다. 오늘만 지나면 둘은 각자의 부대로 돌아갈 것이고, 그 뒤로는 만날 일이 없으니까. 그것만 생각하면 기분이 조금 나아져 매버릭은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방에서 나왔다.
그니까. 순 충동이었다고.
졸업식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위급 상황이라고 임무가 내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뭐, 적이 그런 걸 봐줄 리가 없지만 말이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적이 후방에 있으니 도망치는 것이 맞았다. 그 구스조차 일단 빠져나가는 게 맞는다고 말했으니. 머릿속으로 알고는 있었는데, 그게 합리적인 건 아는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아이스를 두고 갈 수 없어."
"야, 너 설마..."
지금 하는 말은 모두에게 들릴 게 뻔했으니 구스는 그 이상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매버릭은 어렵지 않게 뒷말을 짐작했다. 아이스맨이 네 짝이라서 그러는 거냐고.
"집중해. 구스, 적기들은 어디 있지?"
"좌측에 미그기! 5시 방향. 발사하려고 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저 죽음의 문턱에서 걸어 들어오기 위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본능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그 감은 놀랍게도 들어맞았고.
"머스탱, 여기는 부두 3. 나머지 적기는 도주함."
"오, 매버릭. 나 지금 너한테 키스할 수 있을 거 같아…."
구스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아마 할 수 있었으면 아예 업고 다녔겠지. 극한까지 몰렸다가 살아 돌아왔단 생각에 웃음이 저절로 비실비실 샜다.
착륙한 비행기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서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가 저를 둘러싸고 즐거워하는 와중에, 익숙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이스맨.
"너는 여전히 위험해."
"..."
"그렇지만 넌 언제나 내 윙맨이 될 수 있어."
"개소리. 그건 너겠지."
아이스맨이 바로 매버릭의 몸을 끌어안았다. 매버릭은 최대한 까치발을 들며 아이스맨의 발을 밟지 않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인정해주는 건 기쁘지만,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축하 파티가 열렸다. 모두가 하드덱에서 정신없이 술을 마시며 졸업과 승리를 축하했다. 병이 비워지기 무섭게 새로운 병이 들려지기를 반복하고, 몸이 들려서 위아래로 요동치기를 여러 번. 나중에는 전투기를 타면서도 겪어본 적 없는 멀미가 날 지경이라 자기들끼리 신나게 노는 틈을 타 매버릭은 겨우 그 자리를 탈출했다.
사람이 우글거리는 술집 안보다는 밖이 오히려 더 선선했다.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온 매버릭의 앞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매버릭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또 만났군. 어색한데.
"다 좋은데, 왜 하필 너냐?"
"왜, 다른 사람이라도 있길 바란 거야?"
"응, 조금 더 가냘프고 여린…. 금발의 여성분이 있었으면 했지."
아이스맨이 픽 웃으며 주머니에서 성냥갑과 담배를 꺼냈다가, 멈칫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안 피우고?"
"너 담배 냄새 안 좋아하잖아."
그걸 어떻게 알았지, 싶으면서도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환영이었기에 매버릭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택했다. 그 뒤로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매버릭의 앞에 아이스맨이 어느 순간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매버릭은 그제야 아이스맨이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런 거 없는데."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눈이 올곧게 시선을 마주해왔다. 매버릭의 울대가 자신도 모르게 넘어갔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으려나. 들렸겠지.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숨결이 닿을 것 같아서. 머릿속에 비상경보가 울렸다. 제발, 생각해 내. 거미줄에 발이 걸린 것처럼 그 진득한 시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이스맨의 발을 밟은 건 온전히 실수였다.
발바닥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네임의 상대와 네임을 닿았을 때 느끼는 감각은 차원이 달랐다. 단순히 신기할 뿐이라는 사람들의 말이 이해 가지 않을 정도로. 척추를 따라 뇌까지 쾌감이 전기처럼 짜릿하게 흘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이 풀린 매버릭이 비틀거리자 아이스맨이 매버릭의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끼우고 느른하게 웃었다.
"그래? 지금은 생긴 것 같은데 말이지."
그제야 매버릭은 구스가 했던 아이스맨에 대한 평가를 떠올렸다.
냉정한 비행술, 무결점. 상대를 지치게 한 다음에 무료해져서 멍청해지면 냉큼 잡아먹는-. 이를 어쩌지. 구스, 너무 늦게 눈치채 버렸는걸.
아이스맨이 매버릭의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얹었다. 콜사인과 대비되는 따뜻하고 말랑한 입술의 감촉을 느끼기도 잠시. 아이스맨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매버릭의 손으로 뒤집어 까서 그 안에 있는 글씨를 보여 주었다.
피트 매버릭 미첼.
부정할 수 없이 오롯이 제 이름이라. 아이스맨의 네임도 저였구나. 매버릭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 네가 제일 잘 하는 거잖아."
머릿속이 환하게 읽히기라도 한 것처럼 중얼거리는 말이 들린다. 아이스맨의 손바닥이 점점 턱선을 타고 올라오고,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혀가 유독 달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매버릭은 굳이 닿아오는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하드덱 안에서는 여전히 떠들썩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아는 사람이 나와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매버릭은 그냥 아이스맨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할 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키스는 달콤했고, 여름밤의 공기는 시원했으며. 조금 더 닿고 싶다는 욕망만이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