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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구 - vapour trail

vapour trail: 깊게 패인 항적운

 

언제부터 피어난 사랑이었나. 첫눈에 반한 사랑은 아니었다. 아니었나? 내 삶을 영화로 만든다면, 먼 훗날의 관객은 사랑으로 읽었을지도. 지지부진한 사랑의 노동을 시작한 순간을 첫 만남으로 정하는 것도 낭만일 테지. 아이스는 기억력이 좋았다. 그날 매브의 옷매무새, 입가에서 퍼지던 알코올의 향, 실내 난방에 말라 있던 입술의 건조함까지 하나하나 다시 되살릴 수 있었다. 유심히 바라봤기에 알 수 있었다. 그 착실하던 쿠거 대신 온 어린애에게서 무엇을 봤나, 몹시 치기 어린 유치한 것이었다. 곧 미 해군의 재앙이자 축복이 될 그 남자는 그저 불장난으로 하러 온 바에서 첫인사를 나눴다. 그 우스운 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매버릭. 피트 미첼. 상명하복이 뚜렷하며, 개성이 사라지는 군대에서도 살아남는 파일럿들의 그 질려버릴 자아 속에서도, 그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1등이라고 자부하는 옆에 우습고 다정한 거위를 하나 데리고 다녔다. 슬라이더와 몇 번 말을 나누고는 금방 친해진 그 거위. 친구를 어찌 사귄 것인지 본인은 늘 날이 서 있었다. 세상을 전부 받아들이려는 듯, 눈빛이 영롱한 사람이었다. 반짝이는 눈망울이 가끔은 섬찟했다. 자신감이 넘치고, 탕아 같은 자유로움을 지닌 남자. 자꾸 눈이 갔다. 매일 아침 거위와 걸어 들어오는 가벼운 발걸음도, 교관의 말을 듣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곧장 손을 들고 따져 묻는 입술도, 그 거위 놈 앞에서 웃어 대는 눈꼬리도.


짧았던 탑건 생활은 아이스의 인생에 불을 붙인 부싯돌이었다.


비행마저 거칠고 날 것 그대로인 남자는 탑건에서 인생의 밑바닥을 찍어내고도 차석을 차지했다. 실리 구스와 매버릭, 세트로 불리던 남자는 친구를 잃고 외딴섬이 되었다. 마음에 벗을 묻고도 그 '아이스맨'의 윙맨 자격을 얻어냈다. 천재는 어디 가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이었다. 재능에 비해 어린 마음은 매번 다쳐 댔다. 아이스맨이 옆에 있는 것이 익숙해질 때까지 끊임없이 방황했다. 망망대해에 던져버린 군번줄을 자면서도 찾았다. 그런 밤이면 팔 한쪽을 내어줬다. 항모의 침대는 두 남자가 쓰기에 좁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그래도 매버릭은 벽과 언제나 5cm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두꺼운 혈관이 고스란히 드러난 손이 어깨를 감는 일이 잦아졌다.


"추워."
"응."
"언제 깼어?"
"방금."


그래, 그 윙맨 자격이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정도를 걷겠다고 선언한 남자에게 불확실성이 날아들었다. 스며든 사랑에 아이스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자각하는 것뿐이었다. 어릴 때부터 길러온 훌륭한 객관성은 힘을 발휘했다. 눈앞의 있는 남자를 어떤 의미에서든 사랑하고 있다고 깨닫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삶과 삶이 맞부딪혀 오래도록 곁에 남을, 그리하여 삶의 끝에 회고할 존재로 남을 걸 알았다. 아이스맨이 그러기로 마음먹었기에. 사랑에 중요한 것은 시작이 아니라 끝일 테다.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아이스는 그것이 중요했다. 무엇이든 끝을 봐야 하는 성정에 사랑도 다를 것은 없었다. 어려운 사랑에 눈을 떴다. 같은 군대, 같은 파일럿, 같은 성별. 난이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톰 카잔스키는 난이도를 따지는 것보단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본인 같다고 생각했다. 투지는 훌륭한 원동력이었다. 시작했다면 누구보다 우위를 점했다.


내리 찍혀지고, 다듬어지지 못한 어린 시절에 꿈 꾼 것은 비행이었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로망이었다. 지상의 모든 것들에서 일정 피트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 얽매임에서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일. 자유를갈망하고, 기민한 자아를 확인하고, 부친의 앞에 그 모든 것을 숨겨낼 때, 그런 때에 하늘을 바라보면 숨통이 트였다. 그저 부친이 정한 인생 길을 사는 것을 표방했다. 부친이 원하는 것은 카잔스키에 어울리는 자제로 자라는 것 뿐이었다. 가히 폭력적이고, 강박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뛰어난 것에 한치 의심이 없었고, 언젠가 하늘의 통솔권을 쥐리라 믿었다.이런 강박에 아이스맨의 타고난 욕망이 덧붙여졌다. 잘 자란 부친의 자제는 어린 날의 갈망을만났다. 제 온 삶을 바쳐, 그의 이상을 지키기로 했다.


"서류 봤어. 매브."
"내 파병 지원서 네가 서명했어?"


너도 파병이지, 그런 끄덕임이 둘 사이에 오갔다.


"그래. 자대 배치 나와봐야 알겠지만, 부대는 다를 거야.“
"그렇겠지, 끝나고 보자."


세계는 냉전을 갓 벗어나고도 소란스러웠다. 아이스에게 파병 선택권은 없었다. 훌륭한 군인이 전쟁에 나가지 않는 것으로도 군의 사기는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지독한 단체에서 아이스는 시선의 중심이었다. 카잔스키 가의 탑건 수석, 그의 격추 기록, 알아봤자 쓸데없는 사생활 같은 시시콜콜한 말들까지 군 내에 돌았다. 대부분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슬라이더는 장난이 섞인 말투로 위험한 루머들을 넌지시 알려왔다. 보통은 묵인이었다. 답할 가치가 없는 소문엔 응대하지 않았다. 매브는 헛소리 말라 멱살을 잡고 싸워 대는 것 같았다. 보통은 싸움 이후로 24시간 이내에 소문이 돌아 아이스의 귀에도 꽂혔지만, 좀 큰 싸움이 나면 아이스가 처리하는 서류에서 가끔 봐야 했다. 아직 젊구나, 그리 생각했다. 3살 차이는 아무래도 큰가.


이런 소소한 소식도 묻히는 곳이 전쟁터였다. 소문이고 나발이고, 생존에 의미를 둬야 했다. 어젯밤에 인사한 동료가 죽고 천재적인 비행을 하더라도 간신히 숨만 붙어오는 일이 잦았다. 포격 소리가 울리면 추억이 담긴 육신이 터져나갔다. 격추당하는 일도, 격추하는 일도 일상이 되었다. 자대 배치가 달라도 군대가 함께하는 합동 작전에선 매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엄중한 분위기에 가벼운 주억거림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 작전에선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제군들이 돌아 오기를 바랄 뿐이다. 나라의 영광으로..."


나라의 영광, 작전의 성공, 세계의 정의. 그런 것들이 논할 때의 매브의 눈은 살짝 흐려졌다. 아이스는 으레 군인이 해야 하는 말을 하는 것뿐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죽어있던 눈에도 작전을 다룰 땐 탑건 시절의 그 눈빛이 보였다. 목표물만을 생각하는 눈엔 초록색 칠판과 분필 선만이 반사되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 안에선 또 거침없는 비행이 일어나고 있을 터였다. 하늘을 어떻게 가를지, 복귀는 어찌할지. 루트를 시원하게 그려보고 있었다. 생각하기 끔찍하지만 아마도, 아무 곳에도 묶이지 않은 자신이 가장 먼저 손실될 계획을 세워둔다. 바쁘게 돌아가는 머리는 알 것이다. 계획을 세워도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종간을 잡았을 때 가장 빛나는 파일럿은 그 재능의 축복을 오래도록 누릴 것이다. 아주 작은 판단으로 생과 사가 갈릴 때 그 재능이 제일 번뜩이니까. 그 축복은 오래도록 매브의 목을 옥죌 테지. 우리의 지성은 외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했고, 매브는 외로움을 끌어안고 혼자만의 땅굴로 도망칠 테니까.


간간이 아이스는 매브에게 편지를 썼다. 자대 배치 상황, 전쟁의 흐름, 매브의 안전을 묻는 말들, 그리고 언제나 같이 너의 영원한 윙맨으로 마치는 편지였다. 답장은 최소 개월 단위의 시간이 지나서 사진한 장에 간략하게 적힌 메모 같은 글로 혹은, 만나서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매브는 답을 하는 것을 빼놓진 않았다. 그저 답이 느리게 돌아올 뿐. 아이스는 인내력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어딘가에 기대감을 걸어 놓고 사는 삶이 익숙해졌다. 파병이 끝나면 주렁주렁 훈장을 달고 장기 휴가를 받아 달달한 디저트를 입에 넣었다. 새로운 파병 지원서에 싸인을 하고, 자대 배치를 받아 긴 이별을 준비했다.


아이스가 제 마음을 토해낸 것은 파병이 끝나도 연락이 없는 매브를 찾아 달란 브래들리의 전화가 시발점이었다. 어둠 속에 잠긴 매브를 찾았다. 구스를 보고 싶어 하는 날엔 언제나 망망대해의 시작인 해변 근처에 앉아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저녁 시간에만 그곳을 지켰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닐 낮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은 유난스럽게 별이 높아서, 비행기가 하늘을 가르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붉은빛이 반짝, 반짝, 하늘에 점을 찍었다. 바람은 매브가 외롭지 않도록 계속해서 손끝을 간지럽혔고, 날은 그리 춥지도 않았다. 보드라운 모래로 파고드는 파도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그 망할 거위가 이 풍경에 있다면 캐롤에게 안겨 놀고 있을 거라며 브래들리를 매브에게 맡겼을 것이다. 나에겐 매브를 잘 부탁한다고 했겠지. 매브가 언제인가 거위 꿈을 꾸면,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구스는 사실 멍청한 거위다.' 첫 말이 그랬었나. 다음은 '저녁 시간에 나랑 밥 먹는 걸 좋아했다'였다. 그리 친하지도 않았던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눈을 마주하고 듣기도 하고, 다음날 시험을 준비하며 글을 읽으며 소리만 듣기도 했다. 매브는 후자를 더 편안하게 느꼈다. 늘어놓는 말들이 다양해지는 걸 보면 그런 게 아닐까, 어림짐작하는 것뿐이었지만. 평생 그 거위를 우정으로 이길 수 있는 날은 없겠구나 싶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웃기고 야속한 거위였다.


매브가 앉아있는 곳에 나란히 앉았다. 도망가지 않았다. 다가가도 괜찮나 보다 싶었다. 까만 바다에 한 곳만 빛났다. 매브가 던져버린 군번줄이 저기에 잠겨 있을까. 먼 곳을 바라보던 아이스는 손을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해야 할 말은 눈을 보고 하는 것이다.


"매브."
"..."


매브의 시선이 돌아오지 않았다.그래도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시선이 느껴졌는지 답이돌아왔다. 대답해줄 거면서, 부르면 아는 체 해줄 거면서 시간을 요구했다. 네가 내 윙맨만 아니었어도. 네 비행이 재밌지만 않았어도 안 돌아봤을 거야. 그런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맑게 웃는 아이스가 집요한 눈으로 매브의 입술을 쳐다봤다. 그날의 그 바에서 그랬듯이.


"구스가 보고 싶어. 아주 많이. 구스는 내게 답을 해주지 않아."
"네가 보고 싶었어."


뜬금없는 말에 매브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떠 아이스를 바라보았다.


"좋아해 왔어. 꽤 오래전부터."
"뭐, 뭐?"
"너랑 사귀고 싶어. 내 마음은 그래."


매브의 눈이 떨렸다. 최근엔 꽤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Shit. 아, 미안."


매브는 그 바닷가에서 도망쳤다. 아이스는 한참을 홀로 앉아있다 부대로 복귀했다. 우습게도 다음 달 부대에서 마주쳤다. 얼굴이 마주치자 매브의 얼굴이 홍당무 같이 붉어졌다. 그리곤 또 눈앞에서 도망쳤다. 한참 짧은 다리로 어디까지 가려는 지는 모를 일이었다. 슬라이더에겐 연애하는 거 보려다 늙어 죽겠단 소리를 들었다. 헛소리였다, 웃음이 나오지 않아서 곤란한. 매브가 없어도 일은 해야 했다. 일상은 바쁘게 굴러갔다.


답을 들은 것은 한참 뒤였다. 또다시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난 날이었다. 한껏 도망치던 매버릭이 아이스맨을 닮은 금발의 온갖 여자들과 남자들로 줄을 세울 때였다. 하나 같이 금발에 회색 눈이었다. 매버릭이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 금발이란 소문이 아이스의 귀까지 들어왔다. 새로운 자대 배치 날 아이스는 매우 딱딱하게 질문 하나를 건넸다. 친근하게 다가가면 또 도망가버릴 것 같았다.


"피트 미첼, 질문 하나 해도 되겠나."
"sir, 하십시오."


이래서 진급을 해야 하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제 진급은 매브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진급으로 인해 매브와 함께 수습하는 일의 규모가 커지긴 했지만. 진급이 먼저고, 수습이 뒤였다.


"나 때문인가?"
"무엇 말입니까?"
"네가 금발을 계속 만난다고 들리는 게 나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나를 피하기 위한 연애라면 그만둬도 좋았다. 방황하라고 한 고백은 아니니까. 물론 취향이라면 어쩔 수 없었다. 연애가 하고 싶다는데, 아이스맨에게는 그것을 말릴 명분이 없었다.


"Bullshit, 됐어. 이제 안 만날 거야! 한동안 덕분에 구스 생각도 못했어. 그 시끄러운 거위 웃음소리가 잠깐 안 들렸다고. 그래서, 네 생각을 멈추면 구스 웃음소리가 들릴까 했어. 그래서 만난 거야."


매브가 왁왁, 말을 쏟아냈다. 다 네 탓이야. 달콤한 원망이 쏟아졌다. 그 수많은 애인은 구스를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길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뭘 웃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노려보는 매브는 찬란했다. 세상 그 어떤 빛이 쏟아져도 이렇게 눈부시진 않을 터였다. 레이벤을 써야 하나. 그런 헛소리가 떠올랐다. 건넨 손을 도망가지 않고 잡아줬다. 매브는 키스를 잘하는 편이었다. 누구한테 배워 온 건지 추측할 수도 없었지만. 뭐, 어때 이젠 제 것이었다.


아이스는 제가 가야 할 곳, 해야 할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전투기만을 탈 수 없었다. 탑건에 입학하는 많은 신입생에게 전투기를 배분해 주는 일. 어느 정도 나이가 찬 탑건 수석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매브는 긴 설득을 건넸다. 조금 더 비행하지 않겠나. 부탁하는 것 없던 매브가 나름의 논리를 갖춰서 함께하자고 했다. 아직 작전엔 너 같은 사령관이 실전에서 뛰어야 후배들도 배우는 것이 있지 않겠냐, 파일럿들에게도 경험은 소중한 자원이다.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아이스가 잠자코 듣기만 하고 있자 매브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고집불통, 나보다 더한 매버릭! 마지막은 매브 다운 말이었다. 난 너랑 비행할 때 가장 즐거워. 내 비행에 온전히 맞춰주는 건 윙맨뿐인데.


"난 지상에서도 자네의 윙맨인데. 혹시 새로운 윙맨을 들이려고?"
"제발, 장난하는 거 아니야. 아직 젊잖아. 아이스."


승진을 말리는 애인은 또, 새로운 개념이었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난 최연소 제독이 되는 거고. 승진은 좋은 일이야. 네가 좋아하는 가와사키는 여유롭게 사게 될 거라고."
"갓, 난 이미 가와사키를 살 정도로 부자야. 그리고 네가 이미 모아둔 돈만으로도 가와사키는 충분히 사는 거 아니었어? 제독 옆에 윙맨은 필요 없잖아. 그저 훌륭한 보좌관이 필요할 뿐이야."


매브는 억울한 듯 말을 뱉어냈다. 아이스의 차분한 얼굴에 격한 감정이 실렸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냉정하고 단단한 입술에 내밀한 고백이 실렸다.


"매버릭. 삶에 낙원이 필요 없는 시간은 없어. 그러니까 나의 윙맨이 필요 없는 순간은 없어. 그건 바뀌지 않을 거야. 파일럿만이 아이스맨은 아니야, 제독인 나도 나일 거고. 네 애인이 아닌 나는 별거 아니겠지만."


내가 더러워서 별 4개를 먼저 달았어야 했는데. 널 평생 대령으로 남길 거야. 친 사고가 많아 참모총장은 되지도 못하는 남자가 투덜거렸다. 평생 대령으로 남을 것은 저일 거면서.


"너와 비행을 못 하는 건 아쉽지만, 야심한 밤에 경비행기를 타자. 그걸로는 안 되겠어, 매브?"


수십 년 전 제가 꿨던 꿈대로 살아가는 매버릭을 지켜보는 것으로 즐거웠다. 꿈꿨던 비행은 자신이 해선 안 되는 비행이었다. 위험하고, 자신의 목숨을 거침없이 걸고, 변칙이 다양하고, 경우의 수가 많고, 요행에 손을 빌려야 하는 비행은 아이스맨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신에게 기도할 바엔, 교과서와 이론을 믿는 것이 옳았다. 그런 이성의 판단을 군도 환영했다. 이성을 잔뜩 품은 남자가 내리는 판단은 매브처럼 기적을 이끌진 않았지만, 결과의 균등함을 기대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것만으로 기적인 도그파이트도 해본 적이 있었고.


“그래, 좋아. 맘대로 해.” 


최소한의 희생으로 성공을 거두리라는 믿음. 아이스의 믿음이 진급엔 옳다는 것을 증명해가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날의 자신은 이 모든 일을 겪고도 제 안에 곱게 살아남아 매브를 응원했다.


제가 매버릭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매브는 지금도 몰랐다. 그게 피트 미첼이었다. 제독취임식에 나란히 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땐 말려서 미안, 네 정복 잘 어울린다. 매브가 꽃을 선물했다. 그러자 아직 그 카잔스키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매버릭이라고 면전에서 책망하는 집안 어른이 나타났다. 아이스는 대꾸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능글맞기가 어려웠다.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아 매브는 그저 당황한 표정이었다. 행사가 끝날 때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정말로 미안했다고 매브에게 사과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며 웃어넘기는 매버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시 본가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매브를 먼저 집으로 보냈다. 기사에게 잘 들어갔는지 확인해 달라는 말까지 남겼다. 매브의 저 당연함이 싫었다. 거북함이 올라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거북함이 새로 산 꽃과 오래전에 맞춰둔 반지를 들고 매브를 찾아가게 만든 걸지도 몰랐다. 제독취임식이 끝난 뒤라 밤이 늦어 마감한 화원의 문을 두들겼다. 쾅쾅쾅, 두들기다 작은 비퍼(Beeper)를 꺼내 번호를 남겼다. 자다가 깨 짜증을 내는 화원 주인에겐 두둑하게 챙겨주었다. 주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Will you marry me?' 멋들어지는 필기체의 카드까지 끼워주었다. 서두르는 제 발걸음에 보폭이 쭉쭉 늘어났다.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 모를 걸음이었다. 제독이 지금은, 아주 조금 방심해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새벽만큼은 치기 어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집의 문을 열쇠로 열었다.


온 집이 고요했다. 매브가 제 방에서 자고 있었다. 취임식에서 매브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아이스는 달랐다. 술 마시고 깨우는 애인은 싫어하지 않나. 더군다나 청혼을 이렇게 의미 없게 해버려도 되나. 방에서 꽃과 반지로만. 근사하지 않았다. 그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이스는 핑계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게 현명했다. 그럼, 청혼을 두 번 하기로 하자. 이건 가짜 청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하는 것이 진짜 청혼으로.


"매브."
"으응, 왜?"


잠결에 눈을 가늘게 뜬 매브가 저를 올려다본다. 해군 사관학교 시험 날에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는데. 매브가 치워내는 이불의 팽팽함이 제 종아리에 느껴졌다. 샤워 가운만 입고 자고 있었네. 이건 예비청혼인 거야.


"나랑 결혼해줄래."


반지의 함을 여는 손이 살짝 떨렸다. 근사한 반지가 매브의 사이즈에 딱 맞게 하나, 제 사이즈에 맞게 하나 들어 있었다. 아이스도 한 품에 들기 힘든 장미가 등 뒤에서 나왔다. 애인이 덩치가 크다는 걸 이렇게 또 깨달았다.


"카잔스키! 나 과부 안 만들려고 비행 때려 친다고 한 거야?"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난 비행하다가 죽을 생각 없어. 비행을 때려친 게 아니라 진급한거고. 진급은 좋은 일이야, 피트 미첼."
"벌써 가르쳐 대는 거야? 이런 남편은 싫어."
"미안, 가르친 거 아냐. 그냥 그렇다고. 매브. 어때?"
"사과할 줄 아는 남편은 좋아. 그래, 해."


매브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졌다. 이미 같이 사는 와중에 달라질 게 무엇이냐는 마음 반, 제독까지 단 아이스에게 누가 시비를 걸겠냐는 마음 반이었다. 그리고 거절하기엔 꽃이 너무나 컸다. 법적으로 맺어질 수 없는데 마음 정도야. 상관이 물어보면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그럼 뭐, 언젠가 총사령관 정돈 따오지 않겠어. 상관이 없는 자리로 올라갈 아이스를 지켜보는 건 재밌을 것 같았다. 창문 너머로 긴 비행기구름이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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