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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는 모처럼 그 정장을 꺼내입었다. 은은하게 우아한 남색 정장은 다시 주인을 만난 듯 찰떡같이 어울렸다. 기분 나쁘지 않게 잔잔한 향수 냄새와, 몸에 감기는 천의 질감에 경재가 거울을 한번 바라보고 몸을 움직였다. 근 5년내내 그를 조여오던 정장과의 이별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각종 회담, 회의, 심지어 사석에서도 그는 이 정장을 입어야했다. 그리고... 잠수함에서도. 

1. 경재가 회담실에 들어섰다. 적막이 흐르는 회담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꽤 이른 시간인지라 경호원들만 조용히 자리 잡아 경재를 흘깃 바라보았다. 아마 역사적 순간이 될 통일의 한 장면을 구성할 주인공 중 하나는 경재가 될 것이다. 오늘 입은 이 옷, 그가 하는 말들 또한 모두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묘한 압박감에 경재는 계속 마른 입만 물로 적시기 바빴다. 지지율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아지고 나서 경재는 행동 하나하나에도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고는 했다. 이 지지율이 통일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끔은 가슴이 아려 한참 가만히 숨을 고르기도 했다. 경재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내쉬었고, 

2. 잠수함에서 나오고 난 이후 경재는 선사와 자주 연락하게 되었다. 그렇게 싸우고 몇년을 대립해왔지만 위기상황을 함께 겪은 정은 쉽게 떨어지지 않아서 선사의 연락을 거부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 자주 만날 수는 없었지만, 경재는 분명 선사에게 꽤나 마음이 가있었다. 늘 비난을 자처해야하는 이 자리에서 비슷한 처지에 놓인 친구 아닌 친구를 만났다는 기분 때문일까. 괜시리 그의 문자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는 했다. 대부분 선사가 대화를 이끌고 경재가 답하는 편이었지만 오히려 경재가 더 답장을 기다리고는 했다.

[날씨가 춥습니다. 몸 조심하고 옷 잘 챙겨입어요.]
[저녁은 드셨습니까. 든든하게 챙겨먹어요.]

점점 간단한 안부 문자에도 경재는 마음이 간단하지 못했다. 심장이 따뜻해지기만 해야하는데 따뜻해지면서 뛰기까지 했다. 귀는 붉어지고 입꼬리는 저절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낯설기까지 했다. 이럴 이유가 없는데 왜 자신이 북 위원장이라는 사람한테 마음이 두근거리는지, 나중에는 아니겠지 하며 부정까지 했지만 그래도 표정에서 그의 마음은 그대로 드러나왔다. 
  


3. 선사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공석에서도 변화는 일어났다. 예를 들면 기사사진에서 휴대폰을 꼭 쥐고있는 경재의 사진이 유독 늘어난 것과, 꼭 기자들에게 보여지는 곳에서는 비서에게 요즘 자신이 부쩍 늙은 것 같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물론 비서는 그럼 자신이 뭐가 되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이었는데 그런 영향은 별 거 아니라는 듯 그에 따라 부쩍 얼굴이 밝아진 경재의 사진도 늘어났다. 잔잔한 미소와 여유가 흐르는 얼굴은 부쩍 보기 좋아졌어서 기사 댓글은 온통 대통령이라기엔 너무 잘생겼다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해외 대사나 각종 세계적인 회의에서도 오죽하면 중국 대통령이 한 대통령님 옆에 앉으면 자기가 오징어라도 되는 것 같다고 농을 치기도 했다. 


선사도 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었다. 대외적으로 활동이 늘어나면서 인자하게 웃는 선사의 모습이 자주 사진에 담겼다. 평소에 딱딱하고 까칠하기로 유명한 그의 미소는 세계적으로 논란거리가 되었다. 비핵화협정은 너무나도 순조롭게 끝났고, 그 뒤에 선사는 오히려 대외적으로 조명을 받기도 했다. 개과천선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일각에서는 뭐 새로운 애인이라도 생긴 것이 아니냐고 수근대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만큼 선사가 많이 변한 이유에도 분명 경재의 영향이 끼쳤을

것이다.


알게모르게 둘은 이미 서로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4. 회담실로 들어온 선사를 본 경재가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비어있던 회담실은 이미 기자들과 장관, 간부들로 차있었다. 잠수함 사건 이후로는 전화나 문자, 기껏하면 기사로 둘의 근황을 확인했기에 둘은 서로를 보는 순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기자들은 그런 둘의 훤칠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흘릴 수 없다는 듯 렌즈 속으로 주워담았다.경재가 선사와 악수를 나누고, 간단하게 껴안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난 잘 지냈죠, 안본 사이에 더 잘생겨졌네요?"

둘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 다정하고 친근했다. 카메라 소리가 회담실을 가득 채웠다.

 


5.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경재는 대화하는 내내 정신을 붙잡을 수 없었다. 평소보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선사의 얼굴을 보면 자꾸 심장이 쿵쾅거려 도저히 말을 잇지 못한 것이었다. 압박감을 느끼나 싶어 평소처럼 가슴을 몇번 두드렸지만 그걸로 진정되는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선사가 공석에서 늘 입는 옷도 더 빛나보였고, 선사의 목소리는 귓가를 맴돌았으며, 선사의 웃음에도 귀가 새빨개졌다. 정말 자신이 선사를 좋아하는 것인지 그 생각을 하느라 질문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마무리 짓기까지 했다. 경재는 이런 자신이 마냥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공석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인데 통일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이런 자리에서 잡생각 때문에 실수를 한 자신에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비서실장이 경재에게 물을 건네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괜찮습니까?"

선사가 건물 밖에 나와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는 경재에게 다가갔다. 아까보다 훨씬 친근한 말투였다. 경재가 한눈에 선사를 알아보고 자세를 고쳐 다가갔다. 귓가는 또다시 붉어졌다.

"아까 실수 많이 하시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했습니다."
"아, 자꾸 잡생각이 들어서... 중요한 자리였는데 실수했네요. 죄송해요."
"나한테 미안할 건 아니고, 여기. 커피 한잔 하고 기분 나아지라고 사왔습니다."

선사에게서 편의점에서 방금 사온 듯한 커피를 받은 경재가 희미하게 미소지어보였다. 따뜻한 커피처럼 마음이 녹진해지는 기분이었다.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건네는 경재에게 선사가 괜찮다며 뒤돌아 몸을 움직였다.

"아 그..."
"네?"
"38선 없애고 나면 한번 오세요. 구경시켜드리겠습니다."

선사가 경재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얼굴에는 경재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경재가 다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소리나게 웃고는 답했다.

"꼭, 꼭 가겠습니다. 고마워요 위원장님."

2020 강철비 유니버스 합작: 경계,선

주최 & 디자인 |  구구 (@QB55yn6)

참여자 |  다람이 베개 엘 (익명) 잎 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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