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_mauvaissang

! AU NOTICE !
네임버스 세계관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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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꿈을 꾸고 일어나면 언제나 수많은 갈래의 불안한 예감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같이 불길한 징조 같기만 했고, 줄 담배를 뻑뻑 피워대거나 독한 위스키를 입안으로 삼키는 일들은 일종의 기우제라고 생각했다. 비가 오지 않길 기원하는 의식처럼, 얻을 수 있는 것보단 잃을 것들이 더 많은 삶에 대한 불온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만의 의식. 그 일들은 위안보다는 자위에 가까웠다. 속을 모르는 누군가 - 어젯밤 자신과 함께 침대에서 뒹굴던 그 - 는 그게 자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말하겠지만 선사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위이든, 자해이든, 그건 오롯이 혼자만의 세계라는 점에서 등치 되는 일들이었으니까. 나쁜 꿈에서 깨었을 때 담배나 위스키 대신 찾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누군가를 찾는 일.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보다 더 깊어지고 싶은, 그래서 결국 우리의 세계가 구축되기를 소망하는 일.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소망보다 욕망을 채우는 일이었다. 선사에게는 그게 쉬웠다. 그 일이 이렇게까지 큰 고통을 가져올 줄 알았다면 멈춰 섰을 테지만. 그보다 왜 자신이 그토록 그에게 욕정 하는 지를 조금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 아니,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꿈에서는 과자 부스러기처럼 땅이 무너졌다. 땅을 딛고 서 있는 두 다리가 뿌리처럼 박혀 움직일 수 없었고, 언제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는 아득한 두 발아래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면 표정 없는 그, 하지만 더없이 슬픈 눈을 하고 있는 경재의 모습이 보였다. 섬처럼 떠 있는 겨우 두 발의 크기만 한 땅덩어리. 그리고 터무니없을 정도로 드넓은 여백과 먼 곳의 당신. 제 처지를 보여주는 듯이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참할 정도로.
머리맡을 조금만 더듬으면 찾을 수 있는 담뱃갑 속의 돗대를 보며 선사는 신경질적으로 상자를 구긴다. 그의 미간이 손안의 빈 담뱃갑처럼 일그러졌다.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내뿜은 선사가 구겨진 이마를 손끝으로 부빈다.
"한숨 쉬면 복 달아난다고 기랬는데."
어울리지 않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신기루처럼 흔적이 사라진 옆자리를 바라보던 선사가 볼이 패일 정도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다. 매캐한 연기를 폐부에 가득 채워 넣는 것이 가슴팍이 헛헛한 것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헛헛하다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감상적인 말들이었다. 꿈에선 바닥이 무너져 내리더니 이제는 마음이 기울어지는 기분이다. 불쾌한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선사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눌러 껐다. 밤새 태운 담배꽁초로 가득한 재떨이를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덮는다. 아무리 배를 채워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느낌이었다. 욕구를 채우고 난 뒤엔 늘 허망해지는 게 자연스러운 순서였다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허상을 집어삼키는 느낌. 이를테면 그림자를 안는 느낌. 섹스하고 있지만 그가 여기에 없는 느낌. 늘 조금은 억지스럽게 경재를 안을 때마다 그의 신음 뒤로 그건 채워질 수 없어요, 그런 말들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갈증은 갈수록 심해졌고, 위원장. 그 호칭을 들을 때 마다 선사는 옆구리에서 점점 짙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각인과는 달리, 희미해지고 싶었다.
위원장. 불, 끄고 합시다. 우리.
급해 죽겠는데. 거 부끄러우믄, 그냥 눈만 감으면 되지 않습미까.
꺼요. 꺼 줘요, 불.
기어이 불을 모두 끄고 나서야 그가 섹스를 허락하는 건 세 번째 잠자리를 가질 때부터였다. 허벅지 안쪽의 살갗에 선사의 이름이 적힌 각인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고 했다. 옆구리에 새겨진 자신의 이니셜이 아니었다면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며 넘겼을 테지만 서로를 향한 강한 이끌림과 욕정은, 틀림없는 운명의 장난이었다.
각인이 완연히 선명해진 세 번째 잠자리 후에 정신을 잃듯 잠에 빠졌던 경재가 눈을 떴을 때, 선사는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경재의 살갗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덜덜 떨리던 손끝과 눈물이 맺혀 있던 두 눈, 그리고 새빨갛게 물들었던 그의 뺨과 목덜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생 나타나지 않던 각인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건 처음 잠수함에 갇혔을 때였고, 그 뒤로 당신에게 하염없이 이끌려 갔던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요동을 쳤기 때문이라고 고해성사처럼 말을 늘어놓는 경재의 앞에서, 선사는 비참한 얼굴로 눈물을 쏟아냈다.
탕. 한 번의 총성과 함께 두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린다. 몇 걸음 앞에서 경재의 실루엣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고 나서야 선사는 자신이 잠들었었단 걸 알아챈다. 천천히 한숨을 내뱉은 뒤에 선사는 경재와 눈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칼과 손등을 덮은 하얀색 가운. 드러난 가슴팍과 목덜미에는 밤새 자신이 남겨 놓은 붉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져셔."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탁자에 잔을 요란하게 내려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경재의 다리 사이를 선사의 손이 헤집고 들어간다. 힘을 줘 억지로 벌린 다리 사이에는 여전히 자신의 이니셜이 붉게 새겨져 있었다. 경재가 입술을 꾹 다문다. 슬픔을 삼키는 것처럼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일렁였다.
"북 위원장인 내 운명의 짝이라는 게, … … 남조선 대통령인 거는, 그거는 내 잘못 아니지요. 하늘이 주신 운명이라는 거는 내가 공부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미까."
마음이 말을 막은 듯 입술을 떼지 못하는 선사의 목소리가 꼭 젖어 있는 것 같았다. 호흡을 한 번 가다듬은 선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숨과 말이 뒤엉켜 뒹군다. 말의 사이, 사이엔 자조적인 웃음이 섞여 있었다. 여전히 붉게 부어있는 눈이 안쓰러워 경재가 쓰게 웃었다.
"악몽을 꿀 때마다 찾는 게 이 담배 아니면 술이었는데, 기랬는데… 근데 대통령님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기게 이런 이유일 줄은 내래 꿈에도 몰랐시요.
시작한 적도 없는데 끝을 내야 하는 아이러니, 가혹함.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처럼 또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와 선사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많은 편이네요. 지금까지는 혼자서 이 눈물을 다 흘렸어요? 내가 너무 멀리 있어서, 위원장 당신 혼자 이렇게 울었습니까. 차라리 삼키는 게 더 나을 말들을 목 안으로 숨기며 경재가 선사의 뺨을 쓰다듬는다.
"우리는 수평선 같은 겁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저 수평선이요. 실제로는 닿아 있지 않지만 하나의 경계선을 통해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저 수평선. 나는 앞으로를 그렇게 생각하며 살 작정입니다. 위원장. 아니, 선사 당신에게는 운명의 짝보다 더 중요한 숙명이 있습니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북의 위원장으로, 그리고 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서로를 만나게 된 것은 아마 신의 장난이나 실수였을 거요.
운명이라는 건 언제나 제멋대로이니까. 우리는 늘 그 안에서 최선을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이니까.
아무 말 없던 선사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자신의 뺨을 감싼 경재의 손을 붙잡아 제 가슴팍 앞으로 가져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한 번만 입 맞추고 돌아섭시다.
키스는 길었고, 깊었고, 끈적했고, 짰다. 바닷물처럼. 서로의 이름이 각인 된 살갗 위를 쓰다듬는 손끝이 애틋했지만 들여다보지는 않기로 약속하며, 두 개의 삶이 눕는다. 영영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영영 바라볼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