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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짓 없는 빌런이 또 이상한 무기를 만들었다. 제 딴엔 거창한 이유를 가지고 안그래도 바쁜 히어로들에게 쐈다. 수 천 마리의 파라데몬 군단의 공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무적의 히어로가 이름도 나오지 않을 피래미 잡빌런의 무기에 당할 확률은 0에 수렴했다. 하지만 이 무슨 못된 운명의 장난인지. 무력 999 회피 999 지능 999를 찍은 히어로가 바로 이 피래미 잡빌런의 무기에 맞고 만다. 일반인이 듣기엔 농담도 못 될 이런 일이 생각보다 꽤 자주 일어나는 곳이 바로 히어로 업계였다. 히어로 경력을 햇수 대신 맞은 빌런빔 개수로 센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말이 정말 있냐고 물으면 당연히 없다고들 대답하겠지만. 비정기 이벤트처럼 느껴질 만큼 꾸준히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이 무기를 통칭하는 이름도 생겼다. '빌런빔.' 직관적이고 심각성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것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명칭이었다. 실제로 '빌런빔'은 해롭지 않은 무기 축에 속했다. 크든 작든 목숨을 위협하는 다른 일들이 넘쳐나는 판에 말 끝마다 -냐 또는 -멍을 붙이게 만드는 빌런빔을 맞으면 위기 의식보다 황당함이나 허탈함이 더 컸다. 엄연히 범죄지만, 히어로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다른 사건들에 비하면 애교스러울 정도였다.

이렇듯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도 우려하는 시선은 많이 존재했다. 성향이 천차만별인 히어로들이어도 방심이 가장 큰 재앙을 불러온다는 격언에는 대부분 공감했으니까.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기를 지향하는 어떤 히어로가(보안을 위해 익명처리) 이미 빌런빔 가이드라인의 대략적인 짜임새를 만들어놨긴 했다. 하지만 예의 '빌런빔 사례'들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변칙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모든 걸 한 번에 아우르는 지침을 5항목으로 요약하기란 아무리 ㅂ... 아니 익명의 히어로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드물게도 그가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하지 않고 정규 안건에 이 명제를 올리기도 했지만, 회의 시작 5분 만에 내가 빌런빔 맞았을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잡담만 오고 가기 시작하는 모습에 바로 철회해버렸다. 덕분에『위기상황 대처 지침서』의 【마법과 마법에 가까운 과학의 영역】챕터 아래 '빌런빔' 항목은 일반적인 대처법 몇 줄만 적혀있을 뿐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페이지마다 작은 박쥐 로고가 새겨진 이 지침서는 매일매일 새로운 페이지가 덧붙여졌으니 언젠가는 '빌런빔' 항목 또한 별개의 각주가 첨부된 20쪽짜리 분량까지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범죄는 언제나 일어났고 인류와 행성계를 뒤흔드는 위기 상황 또한 끊이지 않을테니 말이다.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범죄들 속에서 '빌런빔'을 완전히 정의내리고 개별 상황에 정확히 부합하는 행동 강령을 만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아무리 ㅂ... 편집증적인 히어로여도 빌런빔을 예방할 방도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놔야겠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히어로가(역시 보안을 위해 익명처리) 속칭 '우울 빌런빔'에 맞은 사건이었다. 99.99%의 빌런빔이 그렇듯 이 '우울 빌런빔'도 이름에 비해 상당히 보잘 것 없는 성능을 보였다. 제작자인 빌런(Tane V. Qotrufighusgo)은 모든 이를 끝도 없는 절망에 빠뜨려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들거라는 포부를 밝혔지만 빌런빔에 맞은 히어로는 절망에 빠지지도, Tane V. Qotrufighusgo처럼 이딴  세상은 멸망해버려야해 라며 비관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모든 일에 의욕을 '약간' 잃었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불 속에서 하루 종일 꾸무럭거리는 걸로 끝났을 '약간의 의욕 감소'가 히어로에게 적용되자 상황이 다소 복잡해진게 문제였다.

 

새삼스럽지만 히어로들은 부지런한 존재들이다. 정의감과 도덕심, 선함만으로 이중 생활을 감내하며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시간과 수명을 쪼개 공익에 힘쓰는 존재들이 부러 말할 필요도 없다. 그만큼 이 의무를 짊어진 이는 소수였다. 과장이 아니라 무작위로 히어로 둘을 뽑아 직업 관계도를 그려보면 다섯 다리 이내로 겹치는 인맥이 발생할 정도였다. 한 명이 빠지면 바로 티가 날 수밖에 없는데 히어로 하나가, 그것도 내로라하는 메타휴먼들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능력을 가진 히어로가 의욕을 잃으면 일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빌런빔 때문에 세상을 파괴하려 드는 것도 문제였지만 덩치가 산만한 히어로가 망토를 뒤집어 쓰고 출근하기 싫다고 웅얼거리는 것도 문제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선한 근본은 바뀌지 않았기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출동하긴 했지만, 시종일관 찌무룩한 표정이라 시민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았다. 지금은 히어로의 활동이 실시간 보도되는 사회였고 일반인들 또한 심심찮게 '실시간 현장 상황'을 녹화하여 인터넷에 뿌릴 수 있는 시대였다. 사람 구하는 일에 표정 관리까지 요구하는 건 지나친 억지같았지만 여론이란게 그랬다. 무시무시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히어로가 '표정 관리가 힘들면 표정을 알아챌 수도 없을만큼 빨리 움직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쩔 수 없다는듯, 서러움과 고단함이 반씩 담긴 힝...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전달되자 몇몇이 재채기를 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가짜 재채기는 기가 찬 헛웃음과 그저 상황이 재밌어서 나온 킥킥소리를 묻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재채기를 꾸며낸 일부를 포함해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히어로들은 상황을 충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확실히 밝힌다.

아무튼, 신이 도우셨는지(아마 당사자가 종종 감탄사처럼 부르는 그 신이 도왔으리라) 그 날은 비교적 큰 사건 없이 평화로웠다. 그 덕에 '우울 빌런빔'에 당한 히어로의 상태가 외부에 노출되는 일도 없었고 담당 도시의 사람들 또한 히어로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빌런빔의 효과가 사라질 때까지 관리감독 하에 있었던 피해 히어로는 눕거나 가끔 자세를 바꿔 엎드려 있는 것 외엔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일반인처럼 꼬박꼬박 먹을 필요가 없다 뿐이지 식욕은 있었던 그였지만 음식물 섭취도 권할 때를 제외하곤 따로 찾지 않았다. 그저 자는듯 아닌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가져다 준 패드에 퀘이지 컵케이크 매칭 게임을 깔아서 하기도 했다. 나중엔 한숨 소리도 컵케이크가 까르르 웃는 효과음도 들리지 않고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선량하고 반듯한 히어로 중의 히어로가 게으른 바다표범처럼 누워 밍기적거리는 모습은 '빌런빔'이 농담거리가 아닌 나름대로 진지한 위기 상황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심어주기 충분했다. 특히 그의 보호관찰을 맡았던 히어로에게는 더욱 더.  

뒤늦게 덧붙이는 사실이지만 이런 빌런빔 중 대부분이 생명이나 건강에는 딱히 영향을 주지 않았다. 숱한 사례에도 불구하고 히어로들이 제대로 된 대처를 만들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어떤 히어로는(보호관찰을 담당한 히어로와 동일 인물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실력을 막론하고 빌런빔에 당하는 사례가 많은 것도 이 무해함 때문이란 추론을 내놓았다. 직접적인 위해가 없는 공격이니 전투 상황에서의 뇌, 혹은 육감이 반응할 우선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니 기초적인 실험을 통해 검증해보고 결과를 공지해주겠다고 무뚝뚝하게 덧붙이기도 했다. 제대로 된 증거가 없는 추측이었지만 저 말을 한 사람이 사람이다보니 다들 그럴 지도 모르겠다며 가볍게 수긍했다. 빈 말 따위 하지 않는 그 히어로는 다음날 바로 가장 최근에 빌런빔에 노출됐었던 히어로들을 불러 신체 검사를 진행했고 자신의 가설이 일치하는 결과를 눈 앞에서 보여주었다. 막연히 생각만 했는데 실제로 그렇다는 게 꽤 흥미로웠고 실험을 주관한 히어로가 매우, 매우 드물게도 상세한 설명과 중간중간 끼어드는 질문들에("스푸키 넌 밥 대신 벌어지는 모든 일을 분석하는 걸로 영양분을 섭취하지?" / "질문다운 질문에만 대답하겠다니 무슨 소리야 난 진지하게 묻는 거라고" / "와 표정 봐 너 입잠금 빌런빔같은 거 있었음 나한테 쐈겠다? 어디가? 삐졌냐? 악! 이 박쥐가 미쳤나 뭘 뿌리는 거야아아악!") 성실하게 대답해 주는 모습도 퍽 신기했기 때문에 다들 순순히 설명을 들었다. 초반에만 말이다. 단조롭고 차분하던 목소리가 '왜 회피 확률이 떨어지는지를 증명했으니 다음엔...' 이라고 중얼거릴 땐 톤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이 박쥐가 왜인지 몰라도 '빌런빔' 실험에 제대로 삘이 꽂혔다는걸 감지한 히어로들이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어로들 중 가장 빠른 스피드스터들만 마지막에 남아있었다. 두 스피드스터는 처음부터 실험의 집중 대상으로 지목당한 상태였다. 삼 주 전 둘이 동시에 같은 빌런빔에 맞았는데 양상이 다르게 나타났었던 것이다. 일명 '토끼 빌런빔'을 맞은 스피드스터A는 홍당무부터 파스닙까지 모든 종류의 당근을 신나게 찾아먹은 반면, 스피드스터B는 죽지 못해 먹는다는 표정으로 도시락에 담긴 미니 당근을 깨작댔다. 스피드스터B의 진술에 따르면 맛없고 먹기도 싫은데 안 먹으면 또 생각이 나고 이빨이 근질거렸다는 게 아닌가. 그 때 정말 신기했었다며 멘토 스피드스터A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과학 수사대인 그는 여기 불려온 이후로 쭉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눈을 반짝거리며 검사 과정과 이론의 방향성에 관해 의견을 피력하다가 즉흥적으로 다른 접근방식을 가진 실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도넛이 잔뜩 쌓인 접시와 병째로 들고 온 각설탕과 커피 주전자, 그리고 벤티 사이즈 카라멜 마끼아또를 가지러 간 0.5초 정도 외엔 자리를 비우지도 않았다. 덕분에 같이 남아 추가1 추가2 추가3 실험까지 참여하게 된 멘티 스피드스터B는 매드너드 사이언티스트들... 작게 중얼거렸다가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양쪽에서 쏟아지는 잔소리를 실컷 들어야 했다. 정전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쭉 뻗어있던 빨강머리는 잔소리를 듣는 사이 축 쳐지고 말았다. 칼로리가 급격히 바닥난 표정으로 네, 네, 영혼 없이 대답하는 표정이 매우 불행해보였던 탓인지 멘티 스피드스터B는 8시간 만에 탈출할 찬스를 얻을 수 있었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유틸리티 벨트에서 꺼내 준 홈메이드 초코바 8개를 득템한 아이가 부리나케 도망친 후에도 둘은 계속 실험을 진행했다. 아무도 연구한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보니 가설을 하나 풀어낼 수록 또 다른 가설이, 또 다른 방향성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 찾아야 할 답은 모호하고 실험과 토론은 끝날 기미도 없었다. 정상인이라면 나가떨어질 과정이었지만 둘은 히어로였다. 그 의지는 대학원생 열 다섯 명을 한데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강했다. 게다가 누구 말마따나 둘은 너드였다. 철옹성같은 의지와 집념이 비범한 호기심과 탐구욕을 만난 것이다. 우주를 배경으로 워치타워의 한 실험실은 아주 오래도록 불이 켜져있었다. 

일반적으로 실험실에서 발생하는 결과는 크게 두 가지다. 극적인 성공과 불행한 사고. 히어로 업계에서는 두 가지 경우 모두 아주 높은 확률로 예상치 못한 사태를 일으키곤 했다. 초능력을 가진 빌런의 탄생, 다른 차원을 여는 포탈의 생성, 억만금에 거래되는 대-히어로 무기 등등. 실험실은 위험지대였다. 빼어난 지성이 의도했든 아니든 이제껏 없었던 무언가를, 유례없는 사태를 만드는 곳이 실험실이다. 그리고... 히어로들이 있는 실험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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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분명 내가 도망갈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았는데. 하룻밤만에 대체 무슨 일이...? 월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이는 멘토와 몹시 언짢은 얼굴로 팔짱을 낀 배트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제의 실험열기는 다 어디로 가고 둘 사이에 도는 공기가 약간 께름칙했다.

 

"둘이 싸웠어요...?"
"아냐아냐 안 싸웠어, 걱정 마."

"그런 거 아니니 걱정말거라."

머쓱하게 웃어 보인 배리가 배트맨의 눈치를 살폈다. 입을 앙 다문 배트맨과 뜻 모를 시선을 교환했다. 월리의 촉이 반짝 빛났다. 저건 어른 히어로들이 뭔가 '안전상의 이유'로 숨기려고 할 때 나오는 분위기다.

 

"뭔데요? 왜요? 무슨 일인데요?"

"음... 그게, 사고가 좀 있었어."

"사고요???"

깜짝 놀란 월리가 실험실을 허둥지둥 살펴봤다. 부서진 곳도 없고, 척 봐도 수상쩍은 게 생겨나지도 않았고, 전투가 벌어진 흔적도 없는데? 한층 더 미심쩍어진 눈빛이 두 어른을 추궁하듯 쳐다본다. 대답을 미루고 다시 눈빛이 오고 갔다. 또, 또 저 분위기. 

 

"그냥 넘어갈 생각 마요!"

"숨기려는 거 아니고, 조금 있다 팀 전원에게 공지할거야."

"네게도 메시지가 갈 거니까 기다리렴."

그럴 수는 없지! 스피드스터의 1분은 보통 사람의 사흘이나 마찬가진데 그걸 기다리라고! 

 

"나도 엄연한 실험 참가자인데 알려줘야죠!"

"네가 가고 한참 후에 벌어진 일이다."

"의리없기는! 나도 이 실험에 열과 성의를 기울였는데요! 뭔가 잘못됐다면 최우선으로 알 권리가 있어요!"

"하기 싫어서 도망쳤잖니."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와 덤덤하고 낮은 목소리가 같은 말을 했다. 월리는 당연한 지적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안 가르쳐주면 최악의 경우를 상상할거예요."

"가령?"

엇, 배트맨이 진지하게 반문하다니. 사실 생각해 둔게 없었지만 키드 플래시는 머리를 재빠르게 굴렸다. 보자, 최악의 경우. 최악의 경우... 세상의 모든 베이컨이 당근으로 변했다거나? 빌런이 화학 테러를 해서 마실 수 있는 모든 물이 산성으로 변했을지도 몰라. 해저에 포탈이 열려서 괴수가 침공했나? 아니면 하늘? 땅? 시간의 흐름이 뒤틀렸다거나? 가까이서 블랙홀이 발생했나? 어쩌면 다크사이드가...?! 설마 지금 말한 모든게 한꺼번에?!?

 

"그만, 더 생각하지 말거라."

시시각각 경악으로 물드는 얼굴에 배트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입술이 얇게 열어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설명했다.

 

"내가 빌런빔에 맞았다."

엥? 월리는 저도 모르게 새끼 손가락을 올려 귀를 후볐다. 방금 뭔 헛소리가... 뒷통수를 매만지던 배리가 멋쩍게 말을 받는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뱃츠가 빌런빔에... 아니지, '빌런'빔이라고 해도 되는건가?"

"...좋은 지적이군."

"일단 우리가 만든 거니까 히어로빔...? 안티빌런빔? 빌런빔을 상쇄할 목적으로 파동을 뒤집어 만든 거니까 어... 거꾸로빌런빔?"

"상태를 거꾸로 만드는 빌런빔의 이름인줄 알 거 같은데."

"그것도 그렇네. 그럼 헷갈리지 않을 만한 이름이..."

"잠깐, 잠깐, 잠깐!!!"

삼천포로 새는 이야기에 월리가 빽 소리를 쳤다. 이쪽으로 쏠리는 한 쌍의 시선에-정확히는 카울을 쓴 세모난 눈빛에-약간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목청껏 캐물었다.

 

"뭔 소리예요 그게!? 배트맨이 빌런빔에, 히어로빔, 아니 아무튼 요상한 거에 맞았다구요? 근데 그걸 만든 게 배리랑 배트맨이라구요? 어제 내가 간 다음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서로 무기 겨누고 재미삼아 카우보이 결투라도 했어요? 배트맨은 무슨 상태인건데요?"

마지막에 나온 질문에 배리가 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배트맨이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화난 게 아니라 답변을 고민하는 얼굴인 것 같았다. 손이 올라와 턱을 가볍게 쥐었다. 끝이 날카롭게 마감된 건틀렛에 감싸인 손가락이 입술 위를 톡, 톡 두들겼다. 배트맨이 3초 이상 고민하는 건 처음 본다.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월리의 사고가 마구 질주했다. 일반적인 '빌런빔' 효과로 둘이 저렇게 고민할 리 없었다. 둘이 만든 게 뭔진 몰라도 아마추어 빌런들이 만든 것보다 훨씬 위력이 뛰어나겠지. 빌런을 착하게 만드는 히어로빔을 개발하려다 일이 잘못된 걸지도 몰라. 그럼... 히어로를 나쁘게 만드는 빔인가...? 그걸 배트맨이...? 월리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배트맨의 팔과 망토 자락 일부분을 꽉 움켜쥐었다. 명줄처럼 붙들고 간절하게 물었다.

 

"배트맨... 전 배트맨을 믿어요... 제가 평소에 무섭고 피도 눈물도 없고 엄격하고 꽉 막혔다고 했긴 했지만 그건 다 배트맨 내면의 선함을 믿었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었던 거라구요. 당신이 아무리 사악해졌더래도 우주를 멸망시킬 정도로 사악해진 건 아니죠...?"

"..."

"큽..."

배리가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고 기침하는 척 한다. 웃음이 띄엄띄엄 터져나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에 월리는 눈물이 찔끔 나올 뻔할 정도로 안심했다. 다행이다, 사악해진 건 아닌가봐. 어정쩡한 자세로 월리에게 팔을 붙잡혀 있던 배트맨이 아까보다 뚜렷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겁 먹지 말고 진정하렴."

"하하 겁 먹었다뇨 저는 어디까지나 걱정이 돼서... 와우, 내가 듣기에도 완전 거짓말 같네. 네, 맞아요 진짜 무서웠어요... 아 물론 걱정도 했으니까 너무 섭섭해 하진 마시고..."

가늘어진 눈이 월리를 노려봤다. 개의치 않고 그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팔린 월리가 무심코 쥔 망토자락을 코로 가져가자 배리가 순식간에 유틸리티 벨트 한 칸을 열어 휴지를 꺼냈다. 자연스럽게 휴지를 건네받고 서로 마주보며 헤헤 웃는 두 스피드스터를 보던 브루스는 그저 세 번째 한숨을 삼키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어떤 효과가 나타날 지는 아직 모른다."

"어? 왜요? 두 분이 만들었다면서요?"

"응, 근데 어디까지나 빌런빔을 무효화할 목적으로 만든 거라, 그 이상 특정한 효과가 나타나도록 만들진 않았거든."

배리가 양 검지를 쫙 펴고 서로 부딪혔다가, 한 쪽 손가락을 접고 나머지 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말하자면 외부 작용이 선행된 후에 내부에서 맞춤형 반작용이 얼이나는 원리야. 빌런빔이 바이러스면 이 히어로빔-"

"꼭 그렇게 불러야겠어?"

"그럼 배트-플래시빔."

"..."

"플래시-배트빔?"

"...히어로빔으로 해."

"아까도 말했듯 빌런빔이 바이러스면 이 배트-플래시빔은 항바이러스제. 이해가 되니?"

"아하. 그럼 배트맨은 그냥 감기 주사 맞은 상태인거예요?"

"아니."

"대충 그래."

빨간 코스튬이 눈을 찡긋하자 노란 코스튬이 이해했다는 듯 똑같은 박자로 맞윙크를 했다. 검은 코스튬은 네 번째 한숨을 뱉었다. 마음이 완전히 가벼워져 평소의 장난스러움이 돌아온 월리가 싱글거렸다.

 

"그럼 별 문제 아니네요!"

"유감이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 효과가 전혀 검증되지 않은 거라 우리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거든."

"그런 걸 자기 몸에다 쐈어요!?"

미쳤어요?! 를 고스란히 옮긴 듯한 표정으로 월리가 배트맨을 쳐다봤다. 배리가 황급히 정정했다. 

 

"아냐! 반응을 살펴볼 수 있게 세포 샘플에다 쏘려고 했지! 근데..."

약간 부끄러운 표정으로 배리가 중얼거렸다. 배트맨마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계산 결과보다 반응 범위가 넓어서 근처에 있던 뱃츠가 그만..."

"샘플 자체가 빔을 일정량 반사했을 가능성도 있어."

"오...? 그럴 수도 있겠네. 일반인은 물론이고 메타휴먼 중에서도 특히 딴딴한 피부에서 체취한 샘플이니..."

"결론은,"

배트맨이 무뚝뚝하게 말을 잘랐다.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당분간 나 혼자 격리되어 있을거다."

"어어,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리고 반대야."

"어, 저도 의견 내도 돼요? 그럼 반대 두 표예요."

배트맨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팔 부분에 내장된 기기를 조작해 공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첫 단어를 입력하기도 전에 눈 앞에 붉고 노란 잔상이 훅 지나갔다. 다섯 번째 한숨.

 

"내놔."

"잠깐, 잠깐. 이건 네 독단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냐 뱃츠."

"맞아요!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합의해야죠!"

척추가 오싹할만큼 무섭게 인상을 쓴 배트맨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기세등등했던 월리가 슬그머니 거리를 벌렸다. 분리한 자판을 손에 든 배리가 당당히 이의를 제기했다.

 

"네가 쓴 지침서 나도 읽었거든? '빌런빔에 맞은 대상의 처우는 본인 외의 히어로들이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며?" 

"옳소! 대상의 처우는 본인 외의... 어 근데 무슨 지침서요? 우리한테 지침서가 있어요?"

"개인 기록일 뿐이니 신경쓰지 마렴."

"그렇지 네가 직접 쓴 '개인' 기록이지. 가장 적합한 방침이라고 판단했으니 기록으로 남긴 거잖아."

네가 쓴 거니 너도 따르란 의미였다. 일이 있어 케이브로 배리를 불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곳저곳을 순진하게 기웃거리는 걸 그냥 둔 것도 실책이었다. 브루스, 기다리는 동안 네 자료 좀 봐도 돼? 내가 접속 가능한 걸로! 사람 좋게 부탁하는 걸 순순히 그러마 해준 게 가장 큰 패착이다. 대답을 기다리던 배리가 브루스의 시선이 향한 자판 패드를 다른 손에 바꿔 잡고 사람 좋게 웃었다. 가장 유해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타협하기 어렵다는 걸 브루스는 잘 알고 있다.

 

"입으로 두 말 하는 타입은 아니지 뱃츠?"

"나는 되지만 너는 안돼 이거 진짜 짜증나는 버릇이라고 로... 아니 익명의 동료가 그랬어요."

배리의 등 뒤 사각지대로 숨은 월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을 얹었다. 여섯 번째 한숨. 

 

"아 그리고 네가 대답을 고민하는 거 같길래 내가 대신 공지 돌렸어. 고맙다고 안 해도 돼."

잠깐 펴졌던 미간이 다시 와작 구겨졌다. 배트맨이 짜증스레 입을 벌린 순간 실험실 입구가 열리고 엄청난 속도로 누군가 들어왔다.

 

"B! 배트-플래시빔에 맞았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붉은 망토가 일으킨 바람이 뒤늦게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결 방향이 바뀐 머리카락을 더듬으며 월리가 얼빠진 표정을 했다. 슈퍼맨 지구에 있었던 거 아니었나? 쳐다보기만 해도 위엄 넘치는 파란 등이 우뚝 서자 배트맨이 거의 다 가려졌다. 솟은 귀 끝과 몸 양 옆으로 늘어뜨려진 망토만 보인다. 

 

"비켜 슈퍼맨."

"B...!"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단단히 화가 난 듯 했다. 검은 건틀렛이 슈퍼맨의 어깨를 잡고 밀었지만 아니나다를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월리는 거리를 확실히 벌리는 동시에 어른 셋을 한번에 잘 볼 수 있는 자리로 몸을 옮겼다. 상황이 조마조마했지만 어떻게 흘러갈 지 보고싶은 마음이 더 컸다.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가 다시 웃음기 어린 얼굴로 돌아온 배리가 클락의 어깨에 팔을 얹고 너스레를 떨었다.

 

"봐 뱃츠. 수피도 이렇게 걱정하고 있잖아. 혼자서 해결하는 건 말도 안돼."

"B, 내가 빌런빔 맞았을 때는 반드시 다른 히어로와 같이 있으라고 으름장 놨었잖아."

"..."

"너 하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조치다, 상태가 정상이 아닌데 혼자 뒀다가 무슨 일로 이어질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효력이 얼마나 지속될 지도 미지수니 보호 관찰은 필수다. 전부 누가 한 말이게요."

월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고 배트맨이요! 할 뻔 했지만 참았다. 논리와 합리를 양 날개로 달고 자신만만한 배리가 일부러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그러니 순순히 배트-명령에 따르... 뱃츠?"

 

배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브루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상태가 조금 이상해보였다. 그를 중심으로 방 안에 넘실거리던 장난스러움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월리가 약간 긴장했다. 무슨 일일까...? 배리는 어떤 동작에도 앞설 수 있게 준비하며 브루스를 관찰했다. 클락을 곁눈질하자 눈썹을 모으고 집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소리를, 아니면 근육이나 혈액의 움직임에 귀 기울이는 것 같았다. 월리가 보기엔 여전히 똑같은 표정을 한 배트맨이 잠깐 틈을 두고 입을 열었다. 여느 때처럼 낮은 목소리가 말한다.

 

"알았어."

"뱃츠."

"숨길 생각 없어. 확실히... 변화가 생기는 것 같으니 분석이 필요해. 기기 연결 해두고 결과는 실시간으로 기록. 열람 권한은 여기 있는-"

월리 쪽을 살핀 목소리에 약간 강세가 들어갔다.

"-어른 리거들에게 주고, 내 상태를 보호관찰하게 될 히어로들이 정해지면 그 때 추가하는 걸로 하지."

"배트맨...?"

조심스럽게 부르는 월리에게 시선이 가 닿았다. 기분 탓인지 가면 아래의 눈빛이 부드러워진 듯도 하다. 덕분에 월리는 망설임없이 질문할 수 있었다.

 

"문제가 생겼어요? 어디 아파요?"

"...아직은 모르지만, 괜찮을 거다. 신체적인 변화가 아니고 심리적인 작용이니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심리적인 작용이라면...?"

더 물어보려는 걸 살짝 고개를 저어 막은 배트맨이 플래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직하게 뭔가를 더 설명한다. 공격성이 늘어나진 않았어. 혹시나 모르니 뇌파 사진을 찍어두지. 그 외의 사항은...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이 몇 마디 더 이어졌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배리가 먼저 나가려했다.

 

"전달은 슈퍼맨에게 맡기지."

시종일관 걱정스러운 얼굴이던 슈퍼맨의 눈썹이 움찔했다. 배리와 클락의 능력치를 견주어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니다. 배트맨은 지금 근처에 슈퍼맨이 있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를 온통 감싼 검은빛은 고요했고 생각을 읽기가 힘들었다. 클락이 손을 뻗으려다 도로 내렸다. 지금은 이유를 묻는 것보다 행동이 더 중요했다. 알았어. 복잡한 심정을 숨기고 밖으로 나섰다. 배리의 눈짓을 받은 월리가 한 박자 늦게 슈퍼맨을 따라 나왔다. 할 말이 많아 보이지만 눈치껏 참고 있는 아이을 앞세운 클락이 한 번 더 뒤를 돌아 봤다. 매끄럽게 닫힌 문에 걱정과 미련이 짙은 시선이 스친다.

 

 

/  3  /

"상황이 그랬었군."

의자를 아슬아슬할 정도로 꺾어 앉은 할이 생각에 잠겨 발을 까닥였다. 1분 이내로 넘어질 게 뻔한 자세였지만 배리는 아랑곳않고 사 온 감자튀김들을 한꺼번에 모아두는 데 집중했다. 넘어질 것 같으면 알아서 초록 발광 조형물을 만들 것이다. 기다렸다는듯 녹색 빛을 발하는 선이 허공으로 쭉 뻗어나왔다. 의자의 균형을 잡는 대신 할은 삐죽삐죽한 미니 박쥐를 만들었다. 잔뜩 성난 표정인 박쥐 주변에 폭발 효과를 곁들인다. 

 

"월리는 어때?"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지. 그래도 잘 참고 있더라."

공지는 성인 리거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히어로들 중엔 월리만이 유일하게 배트맨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클락이 친절하면서도 확실하게 타이른 덕인지 그로부터 일주일 이상 지난 지금에도 월리는 착실하게 기밀을 지키는 중이었다. 눈치 빠른 친구들이-로빈이라던가 로빈이라거나 로빈-이변을 감지하고 월리더러 불으라며 마구 쪼아댔지만 그의 조카는 괴로움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낼 줄 아는 타입이었다. 괴로울 정도로 쏟아지는 관심이 괴롭다며 날마다 하소연하는 모습이 꼭 연이은 앙코르에 한숨 쉬는 오페라 스타같았다. 

박쥐를 조종해서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들고 입으로 가져가며 할이 물었다. 몸보다 최소 세 배는 더 큰 감자튀김을 잡은 박쥐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손으로 집는 것보다 네 배는 더 수고로운 짓이었다.

 

"거 뭐냐, 상태 실시간 업데이트 된다며. 어때 보여?"

"너도 확인할 수 있는 거 알지?"

"난 나보다 내 베프의 분석을 믿어."

배리가 눈알을 굴렸다. 크게 한 입 베어 문 치미창가에서 소스가 뚝 떨어졌다. 감자튀김으로 떨어지는 소스를 받아내고 입에 던져 넣는다.

 

"여전해. 눈에 띄는 변화 없음. 일 많이 하는 줄은 알았는데 활동 패턴 보니 정말 많이 함. 매우 부족한 수면 시간과 불규칙적인 식사에도 불구하고 근손실이 오지 않음. 제일 변화가 많은 건 혈당 수치. 간식 때문일텐데 식단 바꿀 생각이

없어보임."

"앞에 한 말 취소할게. 네 분석 형편없어."

"요점은 안정적인 상태라는 거야. 배트-플래시빔을 맞기 전과 다름 없이."

"그 명칭 공식적으로 정해진거냐? 아니라고 해줘."

"나도 플래시-배트빔이 더 좋은데 뱃츠가 워낙 배트-접두사를 좋아하잖아."

이번엔 할이 눈을 굴렸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감자튀김을 질겅질겅 씹는다. 정상, 정상이란 말이지. 박쥐는 늘 비정상이니까 지금 정상도 비정상일거고 정상인 상태란 건 평소의 비정상인 상태란 거고... 의미없는 말장난을 머릿속으로 굴리다가 갑자기 답답해져 몸을 들썩였다.

 

"아니, 그럼 대체 왜 저러는건데??? 요 사이에 박쥐가 하는 행동 너도 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진 할이 으으, 작게 신음했다. 조심해야지. 우물우물 음식을 씹는 베프를 째려봤다. 너 나 잡아줄 수 있었지 않았냐. 응 그럴 수 있었지. 누운 등 아래 받침대를 만들어 미라처럼 몸을 세운 할이 하다 만 말을 이었다.

 

"걔 진짜 이상해졌다니까? 몸 상태야 멀쩡할 지 몰라도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해. 스푸키가 아니라 그리디(greedy)라고 불러야..."

"안녕 뱃츠!"

순간 움찔한 할이 어깨 너머를 보려다 눈을 흘겼다. 이런 장난이 한 두 번도 아니고 또 속을까보냐. 보란듯 초록 미니 박쥐를 치와와 크기만큼 부풀리고 감자튀김 속으로 다이빙 시켰다. 튀어오른 감자튀김은 죄다 배리의 입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금화 속을 헤엄치던 오리 캐릭터처럼 감자튀김 속에서 버둥거리던 박쥐가 욕심껏 날개를 펼쳐 부스러기를 싹싹 긁어 모았다. 할이 가성으로 쫑알거렸다.

 

"내거야! 난 감자튀김을 먹지도 않지만 내가 가져야겠어! 남의 점심이라도 상관없어! 난 그리디박쥐니까!"

"내 목소리가 그렇게 들린다면 하루 빨리 병원에 가보도록 랜턴."

으... 표정이 일그러진 할이 옆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감자튀김을 한아름 안고 있던 박쥐도 할을 따라 몸을 돌렸다. 테이블 끝에 서 있는 배트맨이 박쥐를 내려다보곤 깔끔하게 무시했다. 배리와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주고 받는다. 

 

"나야 병원 가서 고친다지만 넌 어쩌냐. 농담을 못 알아먹는 귀는 지구 의료기술로 못 고칠텐데."

"그런 병이 있다면 악화되길 바라야겠군. 네 말이 원천 차단될테니."

아이구 잘났다 그래. 입을 삐죽인 할이 박쥐를 도로 쪼끄맣게 만들었다. 밴댕이 소갈딱지보다 좁은 아량에 걸맞는 크기다. 제일 통통한 감자튀김 하나를 잡고 다시 입으로 가져오게 만드는데, 시선이 따라온다. 아 설마 또... 

 

"뭐. 왜?"

"..."

"사람 뭐 먹는데 건드리지... 야!"

초록 박쥐에게 검은 박쥐가 손을 뻗었다. 눈깜짝할 새에 감자튀김을 뺏어 갔다. 망설임없이 입에 넣는다. 기가 찬 와중에도 저 까탈스러운 놈과 기름기 번들거리는 패스트푸드가 참 안 어울린단 생각이 든다. 솔직히, 감자튀김 기름과 소금 부스러기가 저 건틀렛에 묻어있을 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거고 할 말은 해야했다.

 

"남의 걸 왜 뺏어 가!?"

"먹고 싶었으니까."

"먹고 싶으면 다 뺏어가도 돼?!"

"당연히 안 되지. 그것도 모르나?"

"뭔...! 네가 뺏어갔잖아!"

"할, 그냥 넘어가. 감자튀김 하나잖아."

"감자튀김 하나가 인간 존중의 상징이 될 수도 있는거야!"

빽빽 우기는 소리에 배트맨이 툭, 돌처럼 말을 던졌다.

 

"랜턴 네가 산 것도 아니잖아."

할 말 있냐는 듯 배리가 눈썹을 치켜 떴다. 할 말이 없어 이를 득득 갈았다. 자본주의 폐해를 빚어 만든 놈 같으니. 친구 편을 골고루 들어주고 싶었던 배리가 큼큼 헛기침 했다.

 

"뱃츠, 먹기 전에 나한테 먼저 물었어야지."

"내가 실례했군."

순순한 대답이 더 열 받았다. 유들유들 넘어가주는 베프도 얄미웠다. 쟤들 분명 나 열 받으라고 일부러 저러는 걸거야. 화를 삭이기 위해 감자튀김을 입에 우겨넣다가 하마터면 초록 박쥐도 삼킬 뻔 했다. 몰래 뱉어내보니 잇자국이 선명하다. 배트맨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

 

"조절이 잘 안 되는군."

"그건 이해해. 배트-플래시 빔의 효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이름 바꿔. 욕심쟁이 박쥐빔이라고 해. 재수없는 뻔뻔박쥐빔도 괜찮고."

찰흙 만지듯 박쥐를 조물조물 고쳐놓던 할이 투덜거렸다. 사실 할의 투덜거림은 배트맨의 증상을 상당히 잘 요약한

말이었다.

빔을 맞은 후 한동안 상태를 지켜봤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기에, 배트맨은 곧바로 원래 하던 업무로 복귀했다. 상태를 지켜볼 동료 하나가 따라붙은 것 외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빔의 끼친 영향을 처음 발견한 건 세 번째로 모니터링 파트너가 된 마샨이었다. 일정 시간마다 독심술로 배트맨의 정신을 살피고 변화가 있는지 알아내는 업무에는 존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이미 암묵적인 동의가 끝난 상황임에도 존은 배트맨에게 마음을 읽어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했다. 마샨다웠다.

자기 할 일을 하는 배트맨 옆에서 조용히 제 몫을 다하는 마샨은 무척 평화로운 조합이었다. 리거들 중 제일 가는 평정심을 가진 그가 당황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오."

그 거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배트맨의 생각 하나를 감지한 마샨이 동그랗게 입을 모으고 애매한 감탄사를 뱉었다.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을 예의바르게 절제해서 표현한 '오' 소리에도 배트맨은 여전히 제 할 일에만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는 듯 보였다. 그 짧은 새 감정을 정리한 존이 친절하게 브루스를 불렀다.

 

"배트맨?"

"..."

"방금 전 떠올린 생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별 뜻 없었어."

딱딱한 어조 아래서 민망함을 읽은 마샨이 빙그레 웃었다. 한사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배트맨을 가만히 응시하며 기다렸다. 닮은 점이 거의 없는데도, 이런 인내심 때문에 브루스는 종종 마샨에게서 알프레드를 느끼곤 했다. 입술을 꾹 깨물고 하던 일을 마무리한 브루스가 몸을 돌려 존을 마주 봤다. 반듯하게 앉은 화성인이 차분하게 물었다.

 

"제가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방금 당신은 아주 강렬하게 제 오레오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

"배가 고프십니까?"

"아니."

"그럼 군것질을 하고 싶은가요?"

"...아니. 지나가는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 대답은 거짓말이라고 단언해야겠군요. 잠깐 훑어보기만 했는데도 당신이 제 오레오를 얻기 위한 계획을 열 두 가지나 짜둔 게 느껴졌는걸요. 단순한 요청만으로 얻어내기 힘들거라 판단하신 모양이지요? 그건 맞습니다."

"..."

반박할 수 없어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손 끝을 노려보는 배트맨에게 화성인이 부드럽지만 완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오레오를 아주 좋아합니다. 다소 이기적일 수 있지만 제 몫의 오레오는 제가 다 먹고 싶어요."

"충분히 이해해. 이 일은 그만..."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더 해야겠군요. 제가 알기로 당신은 단 음식을 꽤 즐기니 오레오도 좋아할 겁니다. 하지만 저만큼이나 오레오에 열광하는 사람은 아니지요. 사실, 고를 수 있다면 오레오보다 쿠키 쪽을 더 선호하지 않나요?"

"존..."

"아, 죄송합니다. 딴 이야기로 빠질 뻔 했네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의 잘 알려진 성향에도 불구하고 제 오레오를 저만큼이나 강렬하게 원했다는 점, 그리고 제게 숨기지도 못할 만큼 머릿속을 이 생각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척 이상한 일이에요. 당신은 마음을 숨기는 것에 누구보다 능숙한 배트맨이니까 더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 알았어. 거기까지만 말해도 돼."

"그 말은 저처럼 당신도 이 변화를 배트-플래시 빔에 의한 것이라 결론내렸다는 뜻인가요?"

"..."

무언으로 긍정한 배트맨은 유리같은 얼굴을 하고 화성인이 붉은 시선을 전부 받아냈다.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는 표정을 훌륭하게 가장하고 있었다. 그게 더 역효과였다. 존은 정중하게 웃음을 참고 일어섰다. 

 

"그럼 제가 다른 동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증상을 영영 모르고 지나가는 것보다는 희망적인 상황이네요."

"존."

가까스로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가 마샨을 불렀다. 왜 그러시죠? 친절하게 묻는 말에 그답지 않게 한참 망설인다. 거의 알아차릴 수도 없을만큼 미미하게 손가락들이 움찔거렸다. 내면의 충동과 싸우는 것 같았다. 의아한 표정이던 마샨이 아, 소리를 냈다. 

 

"제 오레오요?"

"...제어할 수 없을 거 같군."

"오... 상황에 적절한 발언은 아닙니다만 실로 흥미롭네요..."

하긴 제어할 수 있는 반응이면 마샨이 알아챌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빌런빔에 맞은 모든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증상을 제어할 수가 없다는 것. 히어로급의 강한 의지와 절제력을 가차없이 꺾고 효과를 밀어붙이는 점만큼은 차원 제일이었다. 정작 발동하는 효과란게 하나같이 쓸모없어서 여태껏 제대로 된 무기취급도 받지 못 했다는 황당함도 차원 제일이다. 빌런빔이란. 정말 하찮은 건지 대단한 건지 알 수가 없다. 결국 마샨은 배트맨에게 레드벨벳 오레오 한 봉지를 건네주고나서야 방을 떠날 수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전달 받은 히어로들은 애매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상황이 우습긴 한데 상대가 배트맨인걸 생각하면 마냥 웃기지도 않았다. 물론 체면은 내려놓고 신나게 비웃은 히어로도 있었지만. 어쨌든 증상이 나타났으니 그에 맞는 대처를 해야했다. 처음엔 오레오, 즉 '음식'에 초점을 맞췄다. 배트맨이 남의 간식류를 탐내는 것 같으니 그에게 접근할 땐 음식물을 지니지 말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 동안 배트맨이 쌓아온 이미지를 한 방에 무너뜨리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다행히 이 조치는 금방 수정되었다. 원더우먼과 함께 리그 카페테리아로 들어온 배트맨이 곳곳에 가득한 '남의 간식류'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 몫의 접시에 크림 파르팔레를 조금 덜고선 먹는 둥 마는 둥하다가 디저트로 나온 무화과 타르트를 두 조각 먹어치운 게 전부였다. 아닌 척 그 상황을 지켜보던 히어로들은 마주 앉은 원더우먼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듬뿍 떠왔을 때 살짝 숨을 죽였다. 알려진 증상대로라면 배트맨이 저 아이스크림을 뺏으려할텐데...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 먹던 원더우먼이 뭐라 말하자 남은 타르트 조각을 슬쩍 밀어주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한 쪽을 잘라 아이스크림과 함께 먹은 다이애나가 일어서자 둘은 유유히 식당을 나갔다. 동시에 약간 김이 샌듯한 반응이 남아있던 히어로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다시 없을 세기의 기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는데. 누가 배트맨 아니랄까봐 소리소문없이 증상을 없앤 모양이었다. 

그렇게 상황이 흐지부지 해결되는가 싶었는데 배트맨과 마주쳤다가 텀블러를 빼앗겼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커피머신 쪽으로 가던 중에 바로 앞까지 다가온 배트맨이 거래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충분히 질겁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상대는 퀘스천이었다. 다짜고짜 교환 조건을 말해보라는 무뚝뚝한 목소리에 그는 잠깐 고민하는 척 했다가 배트맨만이 알고 있는 몇몇 정보를 요구했다. 그리고 바로 취소했다. 가늘어진 눈빛에서 경고를 읽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천달러에 어때? 은밀한 목소리로 말하자 계좌 확인해보란 말과 함께 그의 손에서 텀블러를 가져갔다. 보고를 듣고 있던 배리가 물었다. 그 회색 텀블러 주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럴리가. 누가 쓰레기통에 떨어뜨리러 가길래 멀쩡한데 안 쓸거냐고 물어본 다음 즉석에서 공짜로 양도받은 물건이야. 그게 주운거지. 퀘스천이 능글맞게 모자를 까닥였다. 상황은 이게 다야. 빌런빔에 당했다지만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해서 다행이지? 누가 딸기케이크 한 조각으로 배트맨에게서 일급 기밀을 털어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천연덕스러운 평가를 마치고 유유히 가버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갑자기 배트맨의 모니터링 파트너 신청이 확 늘었다. 하나같이 손에 텀블러 하나씩을 쥐고 있었다. 원래 편성될 예정이었던 후보군을 제외하고 싹 돌려보냈다. 파트너 당번 하러 왔어요~ 황금빛을 타고 복도를 날아온 스타걸이 씩 웃었다. 양 손에 든 회색 텀블러에 배리가 책망하는 눈빛을 던졌다. 일생일대의 거래가 될 수도 있잖아요! 까르르 웃는 얼굴에는 악의가 없었다. 당연히 진지하게 한 탕 해먹으려 온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텀블러는 압수당했다. 에이, 가볍게 투덜거리며 배트맨이 일하는 방으로 날아간 스타걸은 장난기를 접어두고 진지하게 제 일을 했다.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은 없고 그저 배트맨을 지켜보다가 가끔 그가 지시하는 보조 업무만 하면 됐기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개인 과제를 하기 위해 책을 꺼냈다. 레포트를 쓰다가 잠깐 고개를 들었는데 배트맨이 이쪽을 보고 있는게 아닌가. 나 뭐 잘못했나? 의자 위에 신발 째로 올렸던 다리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데 낮은 목소리가 말했다. 

 

"그 볼펜, 중요한거니?"

"어, 아뇨? 그냥 산 건데..."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쥐고 있던 볼펜을 새삼 들여다봤다. 꽤 튼튼하면서도 5개에 8달러도 하지 않는 가격이라 종종 사는 필기구였다. 괜찮다면... 배트맨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걸 내게 줄 수 있겠니."

"그럼요. 싼 건데요 뭐. 새 걸로 드릴까요?"

아직 쓰지 않은 만년필을 찾아내서 주자 까만 건틀렛이 부드럽게 물건을 받는다. 고맙구나. 하는 말까지 돌아왔다. 헐 대박. 표정 관리를 하려고 무진 노력하던 중에 배트맨이 다시 제안했다.

 

"갖고 싶은 만년필 브랜드가 있니? 아니면 다른 필기구나... 새 노트북은?"

"있... 긴 한데, 괜찮아요!"

"색깔은 화이트, 플래티넘, 민트, 샌드핑크, 그래피티 골드..."

"아뇨 진짜 괜찮아요...!"

오기 전까지만 해도 퀘스천이 이 증정용 텀블러를 2천 달러에 팔았으면 난 하나당 4천까지 불러볼거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었다. 손사래와 고갯짓을 동원해 거절하는 스타걸에게 배트맨은 더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방해하지 않을테니 네 할 일 하렴. 부드러운 목소리에 스타걸은 고개만 끄덕이곤 얼른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만년필 하나인데도 왠지, 엄청난 도움을 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배트맨의 태도가 그랬다. 정말 저게 맘에 들었나보네... 책 너머로 눈을 슬쩍 돌리자 볼펜을 쥐고 있는 배트맨이 보였다. 크고 긴 손가락이 펜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봐선 안 될 거 같은 기분에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워치타워의 스타걸 개인 사물함으로 새 노트북이 색상별로 배달된 것은 나중 일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하루에도 몇 명씩 배트맨에게 물건을 넘기거나, 거래를 제안 받거나, 그도 아니면 뺏기는 사람들이 나왔다. 나중엔 잡화들을 잔뜩 가져와 펼쳐놓고 골라골라 약장수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나왔다. 배트맨 랜덤박스라는 것도 생겼다. 무작위로 물건들을 나열하고 여기서 어떤 것에 배트맨이 꽂힐지 알아맞추는 게임이었다. 그래도 다들 히어로였기에 돈내기는 안 하고 소소하게 커피 한 잔, 탄산음료 한 캔 정도만 오고 갔다. 상황을 다 알면서도 무시로 일관하던 배트맨 대신 슈퍼맨이 화를 냈다. 동료를 놀림거리로 만드는 건 좋아보이지 않는데. 언성도 높지 않은 차분한 한 마디일 뿐이었는데 파급력이 굉장했다. 살짝 쫀 히어로들이 배리더러 슈퍼맨 표정이 왜 저러냐고 물었다. 배리는 어물쩍 대답을 회피했다. 그 이후로 배트맨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탓이겠지,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상하게 빅블루를 피해다닌단 말이야."

할의 중얼거림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배리가 엉? 소리를 냈다. 어느새 까만 망토는 저만치 멀어지고 식탁엔 다시 할과 자신 둘 뿐이었다. 감자튀김을 내려다보자 할이 벌써 저만큼이나 먹어버렸다. 백발백중의 솜씨로 남은 걸 콕콕콕 집어 입에 넣었다. 약간 뭉개진 발음으로 되묻는다.

 

"뭐가?" 

"슈퍼맨을 안 만난다고."

"음... 착각 아냐?"

"아니라니까. 자기가 이 상태로 바깥에 나가면 무작위로 사람들에게 삥 뜯을 수도 있다면서-"

"표현이 이상한데."

"아 잠자코 들어봐. 그 사고 이후로 쭉 직장에 휴가 내고 타워랑 케이브만 왔다갔다 하잖아. 덕분에 쟤 동선을 질리도록 파악하게 됐는데, 그 많은 히어로들 중에 딱 한 명은 죽어라 안 만나고 있다니까?"

"바쁘다 보면 몇 명쯤 못 만나고 그러니까... 우연이겠지."

"우연이겠냐? 쟤 아웃사이더니 뭐니 하더만 완전 마당발이던데? 뭣보다 평소에도 봐, 공적인 이유 아니더라도 사적으로 제일 많이 붙어다니던 놈이 빅블..."

"나 찾았어?"

흐억. 이번엔 정말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놀란 할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온통 원색인데다 키도 훤칠하고 덩치도 이렇게나 큰데 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몸집이었지만 슈퍼맨은 입꼬리가 습관적인 호선을 그리고 있어 언제나 순해보이는 인상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빅블루가 제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할이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찾은 건 아니고... 그냥 잡담하다가 네 얘기가 나온거지 뭐..."

"왜?"

"오늘 일은 다 끝났어 수피?"

배리가 냅다 끼어들었다. 화제를 전환하려는 노골적인 시도였다. 어색함이 죽기 보다 싫었던 할도 배리의 말바꾸기에 탑승했다.

 

"맞아 요즘 너 바빠보이더라. 고생많다 야."

"나만 바쁜 것도 아닌걸. 근데 할, 무슨 잡담 중이었다고?"

배리만큼이나 노골적으로 다시 화제를 바꾼 클락이 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 음. 망설이던 할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왜 눈치를 봐야하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스푸키 이야기."

서슴없는 대답에 배리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마지막 남은 감자튀김을 천천히 우물거렸다. 스트레스에 식욕이 자꾸만 불어났다. 더 많이 사올걸.

 

"요즘 소소하게 화제잖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어요. 방금도 여기 와서 내 감자튀김 가져갔다니까. 어제는 누구더라? 사무용 포스트잇을 갈취당했다던데, 그 노란 거. 또 뭐 있었지?"

"따로 더 없었을걸...?"

일부러 느리게 말을 하며 배리가 식탁 아래로 할을 툭툭 걷어찼다. 왜 이래? 발 매너 좀 챙기자 베프야. 마주 걷어 차준 할은 기왕 입담이 뚫린 김에 생각하고 있던 걸 줄줄줄 늘어놨다.

 

"기억났다! 호크걸한테 무슨 체인 조각을 가져왔다더라. 전투 때 쓰고 남은 잔해라던데 그딴 걸 왜 갖고 싶어하는지 몰라. 아, 또 자타나는 마술 도구로 장미 생화를 잔뜩 사왔다가 배트맨한테 다 뺏겼다던데."

"뺏은 거 아니고, 달라길래 준거래. 대신 1년치 무대 대관비용을..."

"내 말이 그 말이었어. 아무튼, 나만 그런가 박쥐가 물건을 탐내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지 않아? 이러다가 아주 잡화점을 차리겠어."

묵묵히 듣고 있던 클락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별로 즐거워보이진 않는다.

 

"소소한 화제라더니 아주 잘 알고 있네."

"어... 그야 상황이 길어지니까 걱정도 되고, 신경도 쓰이고~ 그리고 배리가 박쥐 상태를 계속 기록 중이거든. 어떤 물건을 모으는지 뭐 그런거."

"정말?"

 

클락이 제 쪽을 보자 배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불똥이 튀는 건 싫은데. 

 

"사례별로 대조하다보면 연관성이나 단서가 좀 잡힐까 싶어서."

"비공개 자료야? 모니터링 서버엔 없었는데."

"아직 안 올렸어. 이제 막 시작한거라... 리스트도 완성되지 않았고."

"내가 할까?"

"어..."

배리가 최대한 완곡하게 거절할 문장을 찾는 동안 할이 선수를 쳤다.

 

"못할 거 같은데. 박쥐한테 뭐뭐 가져갔냐고 물어봐야 하잖아. 근데 너는..."

"어어어어 생각해보니 도와주면 고마울 거 같아! 내가 금방 리스트 다 완성해서 보내줄테니까, 그거 한 번 살펴봐줄래!?"

"깜짝아!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할이 더 말을 얹기 전에 배리가 빈 포장지를 구겨 들고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친구를 일으켜선 그럼 나중에 메일 확인해! 말하곤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야, 야 잠만, 내 발로 걸을게. 야! 멀어지는 소리는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귓가에 울렸다.

/  4  /

둘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클락의 입꼬리가 직선으로 가라앉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타워 내의 여러 소리를 파악했다. 허공을 바라보는듯한 시선이었지만 눈빛은 줄곧 벽과 복도를 뚫고 한 사람에게 닿아 있었다. 

배트맨이 슈퍼맨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건 그가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한 탓도 있지만, 슈퍼맨 덕분이기도 했다. 조금만 관찰하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저를 피하는 것에 클락은 이유를 묻는 대신 아무 말없이 자기 동선을 바꿨다. 브루스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먼저 브루스가 이유를 말해줄거라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속내도 클락에겐 내보여줬으니까. 당장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어도 브루스에겐 다 이유가 있었고, 클락은 그런 브루스를 믿었다. 브루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브루스는 까다롭고 예민한 친구였다. 브루스와의 소통에는 공간과 기다림이 필수적이었다. 그가 주변에 쳐놓은 공간을 존중하고, 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것. 지미에게 브루스의 이야기를 익명으로 치환해서 들려주자 무슨 야생동물이냐며 어이없어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클락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야생동물이라 뭉뚱그려 칭한 지미보다 더 명확한 이미지도 내심 갖고 있었다. 고양이. 사납고, 손을 내밀면 본체만체하고, 그러면서 자기 좋을대로 다가와 등을 붙이고 앉는 고양이. 만지려고 하기 보다 만져달라고 다가오는 걸 기다려야하는 고양이. 처음엔 저 완고하고 차가운 벽을 절대 깨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같이 웃고 이야기하는 게 당연한 시간이 되어있었다. 스며든다는게 이런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친해져보니 알 수 있었다. 브루스에게 빈 공간이 많다는 건 그만큼 다른 존재가 들어갈 자리도 많다는 것을. 무시무시한 배트맨은 '생각보다' 곁을 잘 내주는 박쥐라는 것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우울하게 복도를 지나던 클락이 허공에 멈춰서 한숨을 길게 쉬었다. 친해진 게 아니었던걸까. 지금, 얼굴도 못 보는 사이가 된 입장에선 우습지만 사실 클락은 '친구' 이상의 기류를 브루스에게 느끼기도 했다. 바로 최근의 일이었다. 그가 '우울 빌런빔'이라 명명된 무기에 당해서 매우 한심한 꼴을 보였을 때, 자신 곁을 지키던 브루스를 보다가 문득 느낀 감정이었다. 바로 알아차린 건 아니었다. 빌런빔에 당했을 땐 정말 모든게 다 의미없게 느껴졌고 색채란 색채는 모두 빠져나가는 것처럼 우울했었으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이유도 몽롱해졌던 그 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던 목소리만은 기억했다. 일어나 슈퍼맨. 잠깐이라도 눈 떠봐, 클락 켄트. '클락 켄트'도 '슈퍼맨'도, 내면의 자아란 자아는 모두 잠 속에 묻어버리고 싶었던 클락이 천으로 머리를 덮고 무시해도 그 목소리는 끈질겼다. 싫어, 다 귀찮아. 웅얼거리는걸 잡아 끌어 의자에 앉히고, 뭔가 따뜻하게 김이 오르는 음식을 내밀었다. 안 먹어도 안 죽는데 왜 먹어야 해. 한탄처럼 들리는 투정에 넌 이거 좋아하니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지못해 한 입을 물었지만 혀가 마분지로 변한 건지, 별다른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는 계속 말했다. 넌 수프는 다 좋아해. 감자가 들어간 건 특히. 한 번은, 카페테리아 식당에 브로콜리 수프가 나왔지. 거의 보이지도 않을만큼 잘게 갈아넣은 브로콜리였지만 난 어쨌든 먹고 싶지 않았어. 우린 그 때 별로 안 친했었지, 기억나? 근데도 넌 내가 식사를 거르니까 따로 나가서 이 수프를 가져왔어. 우리 농장 근처에 사는 꼬마도 야채를 싫어하는데 파는 잘 먹더라고, 그러니 당신도 이건 괜찮지 않겠냐면서. 따뜻하고 맛있었지. 사온 게 아니라 집에 있던 재료로 만들어온거란 건 나중에 알았어. 네 집에 처음 가서 식사를 대접받았을 때 알았지. 제일 좋아하는 수프라 제일 처음 배운 요리라고 말해줬어. 그러니 넌 이걸 먹어야 해. 

숟가락이 바닥을 긁을 때까지도 수프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클락은 몸을 무겁게 누르는 무기력에도 그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수프를 다 먹을 수 있었다. 다 먹지 않는다면 목소리가 너무 슬퍼할 것처럼 느껴졌었다. 누운 클락 곁을 지키다가 책, 퍼즐, 라디오, 게임기를 가져다 주던 목소리는 클락이 지친 듯 눈을 감자 가만가만 이마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거라고 약속해주면서.

슈퍼맨, 괜찮아요?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던 빅터가 잠깐 발을 멈추고 안부를 물었다. 예의 입꼬리를 올린 미소를 지어보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빅터는 앞을 잘 보고 다니란 말과 함께 다시 갈 길을 갔다. 그제야 오 센티도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벽이 있다는 걸 눈치챈 클락이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복도에서 이러지 말고 우주를 한바퀴 돌고 올까, 싶을 때 알림음이 왔다. 배리의 메일이었다.

/  5  /

"뭘 했다고?"

"으아 뱃츠, 너무 화내지 마..."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배리가 양 손을 들어보이며 울상을 지었다. 세상의 빛과 소금, 그리고 선량함을 가득 모아 빚은 얼굴에도 배트맨의 험악한 표정은 누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왜 하필 슈퍼맨이야?"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니까... 내가 너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랬겠어?"

배리의 호소에 옆에 있던 할이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뭐 죽을 죄 진 것도 아니고.

 

"누가 콕 찌르면 쾅 터지는 성미 아니랄까봐 예민하네. 그냥 물건 리스트일 뿐이잖아. 네가 평생동안 저지른 최악의 실수 목록이 아니라고."

"입 다물어 조던."

"싫은데? 입 연 김에, 나야말로 물어보자. 왜 슈퍼맨은 안되는데?"

배트맨의 입술이 꽉 닫혔다.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눈이 저를 쏘아보자 오기가 생겼다. 

 

"애초에 네가 자꾸 피해다니니까 빅블루 분위기가 요즘 말 한 번 잘못 붙이면 안 될 것처럼 변했잖아. 걔 요즘 어떤 표정인지 모르지? 오늘도 진짜,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눈치를 봐야했다고! 웃고는 있는데 완전 쎄한 게-"

"할~ 내 친구야~?"

"둘이 싸웠냐? 아님 갑자기 자라난 네 욕심주머니가 슈퍼맨만 보면 무지막지하게 커지기라도 해? 남들은 물건 하나씩, 감자튀김 하나씩만 뺏어오는 걸로 족하지만 슈퍼맨을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벗겨버릴 거 같아?"

브루스의 표정에 파문이 일어났다. 요점을 정확히 짚어놓고, 정작 할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배리가 천장을 한 번 보고 왜 내 베프는 저렇게 눈치가 없을까 소리없이 한탄했다. 할이 앉은 의자를 질질 끌어온 배리가 귓불을 꽉 잡고 뭔가를 속삭였다. 끌려가던 중에도 왁왁대던 할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브루스가 배리를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인 배리 옆에서 할이 약간 창백해진 표정으로 브루스를 쳐다봤다.

 

"어..."

"조던, 뭘 들었든 간에 잊어버려."

"박쥐가 슈퍼맨을 좋아해?"

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울 아래서 브루스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가 배트맨이 아니었다면 혀를 깨물었을 것이다. 배리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아 있는 스파크만이 그가 문밖으로 튀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두 사람만 남은 공간에 불 리 없는 찬바람이 휑하니 휩쓸고 지나간다. 할이 굳은 턱을 움직여 뭐라도 말을 하려고 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나치게 큰 정보를 너무 갑작스럽게 받아들인 탓에 뇌에 버퍼링이 제대로 걸렸다. 할의 모습이 살짝 흐릿해지고 있었다. 집중력을 잡았다가 놓쳐다가 하는 탓에 녹색 랜턴 수트가 고장난 텔레비전처럼 지지직거렸다. 이를 득득 갈면서 밖으로 나가려던 브루스는,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때문에 멈춰 선다. 어쩌면ㅡ자각한 이후로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은 적 없는 감정을 이런 기회를 빌어서라도 한번쯤, 제대로 꺼내 보고 싶어서 일지도 몰랐다. 아직 빌런빔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가 할 조던이라고 해도 말이다.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쉰 브루스가 천천히 할 앞에 다가갔다. 배리가 앉았던 의자(도망갈 때의 반동때문에 여전히 회전 중이었다)를 가져와 앞에 앉았다. 

 

"그래."

"엉?"

"좋아한다고."

"으어엉...?"

"뭘 더 해보려는 건 아니야. 그냥... 사실을 말한거지."

"어어..."

"클락은... 모를거야. 나도 안 지 얼마되지 않았으니까. 배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보다 더 빨리 눈치채고 있더군. 히어로빔... 아니, 배트-플래시빔을 만들 때 먼저 이야기를 꺼냈어. ...날 배려해주려고 한 거 같아. 응원하고 있다고도 말했고... 고마운 일이지."

"어... 그렇네..."

"네 말마따나 조던, 나는 콕 찌르면 쾅 터지는 성미니까, 이 감정을 함부로 꺼낼 순 없어. 난... 아직 준비가... 내가 이런데 클락은 얼마나... 게다가 정상적인 상태도 아니고."

"그..."

"왜 슈퍼맨은 안되냐고 물었지. 이게 그 이유야. 내가 슈퍼맨을 좋아해서. 그리고..."

브루스가 피식 웃었다. 약간 악랄해보이는 웃음이었다.

 

"'슈퍼맨을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벗겨버릴' 수도 있는 상태니까."

간신히 정신을 다시 쌓은 할이 이 한마디에 다시 와르르 무너졌다. 싫어도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었다. 노렸구나! 으아악,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쥔 할의 어깨를 툭 두들긴 배트맨이 복수에 성공한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바로 근처에서 벽에 귀를 대고 있던 배리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직 화 났어?"

"그렇다면?"

"도망가야지."

"안 났어."

덤덤한 목소리에는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눈치챌 수 있을 개운함이 희미하게 묻어있었다. 배리가 씩 웃었다. 이걸 계산한 건 아니었지만, 때로 사람은 극단적인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저지르고 보는 즉흥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배트맨의 연애 문제만큼 까다로운 난제가 어딨겠는가. 방안을 슬쩍 들여다보자 머릿속에 든 뭔가를 털어내려는듯 마구 고개를 흔드는 할이 보였다. 일단 놔두고, 맨 처음 화제로 돌아갔다.

 

"그래서... 슈퍼맨에게 리스트 보지 말라고 할거야?"

"이미 봤을거야."

"네가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걸."

"...됐어."

"음, 잘 생각했어. 혹시 모르잖아, 이 일로 돌파구가 생길지. 할도 눈치챘더라. 네가 물건을 모으는 주기가 점점 잦아지고 있다는 거."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더 심해지는 게 분명해."

남일처럼 중얼거리는 배트맨의 어깨에 팔을 두른 배리가 은근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어쩔거야?"

/  6  /

 

우주에서 돌아온 제 도련님을 맞이하며, 알프레드는 가장 먼저 목욕부터 하라고 말했다.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브루스가 멈칫했다. 

 

"알프레드, 난 지금..."

"네, 압니다. 그래도 목욕부터 하세요. 따뜻한 마실거리를 한 잔 준비해놓겠습니다."

"안다고요?"

카울을 벗고 드러난 눈이 동그래졌다. 어릴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하늘색 눈에 알프레드가 삐딱하게 웃었다.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셨나요? 이거 참. 커피를 마시는 사이에 세계 제일의 탐정 자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모양이군요."

"아니, 잠깐, 어디서 어디까지 아는 거예요?"

"제가 알아야 할 건 다 압니다. 자, 이제 질문은 그만 하고 씻고 오시죠."

자연스럽게 등 뒤로 가 망토를 떼어낸 알프레드가 쯔쯔, 혀를 찼다. 거기 들어간 돈이 얼만데, 타워에는 난방도 제대로 안한답니까? 서늘한 수트를 능숙하게 벗긴 노집사는 뭐라 항의하려는 도련님을 샤워실로 밀어넣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옷더미를 단번에 들고 계단을 올라가다가, 문득 눈빛이 까칠해진다. 분명 대화를 듣고 있었을 누군가를 향해 확실히 일러둔다. 당신을 위한 게 아니니 샤워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주셨음 합니다. 아니나다를까 대화를 듣고 있던 누군가의 어깨가 움찔 했다.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변명해보지만 집사는 할 말 다 했다는듯 세탁실로 향할 뿐이었다.

 

샤워는 생각보다 오래걸렸다. 금방 끝내고 일을 해치우려던 포부는 따끈한 물줄기를 맞자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대신 잡생각이 많아졌다. 입으로 꺼낸 감정이 다시 제 속으로 숨기 전에 일을 추진하고자 마음 먹었지만 막상 도착하니 겁이 났다. 그가 겁쟁이라는 건 놀라울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지만... 

하도 문질러서 잔뜩 부풀어오른 비누거품을 다 씻어내리는 동안 결정이 몇 번씩 뒤집혔다. 하자, 아니야 때가 좋지 않아. 이미 왔잖아. 다시 가면 돼. 겁쟁이. 배려없는 고백을 하느니 겁쟁이가 나아. 자신을 위한 변명이군. 자기 비하가 섞인 옥신각신을 하는 사이에 거품이 다 씻겨 나갔다. 가재처럼 빨갛게 익어 나온 브루스는 수건을 잡고 물기를 꾹꾹 짰다. 몸을 다 말리기까지 십 분, 십 오 분은 걸리겠지. 그러니... 

자연스럽게 또 대면을 늦출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가운을 두르고 슬리퍼를 신은 모습으로 터벅터벅 발을 옮겼다. 방까지 가는 계단 난간에 마치 다 안 다는 것처럼, 코코아가 준비되어 있었다. 꿀꺽꿀꺽, 한 번에 다 마시기에 딱 적당한 온도였다. 알프레드는 정말 그에게 과분한 집사였다. 방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브루스는 외계인도 들을 수 없을만큼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어서와 B."

생각보다 문가와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클락이 다정하게 인사했다. 슈퍼맨 차림이 아닌, 어리벙벙하고 순박한 기자의 모습이다. 브루스는 대꾸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불빛이 없어 방 안은 어두웠고, 반대편 발코니로 난 창문으로 다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별빛이 은은했다. 

 

"불 켜고 있지 그랬어."

"자네는 어둠이 더 편하잖아."

흥. 콧소리로 대꾸한 브루스는 클락을 지나쳐 침대 옆으로 갔다. 커튼을 쳐둔 침대에 눈길을 두고 짧막하게 물었다.

 

"리스트 봤나?"

"응. 난 할이 과장한 줄 알았는데, 브루스... 정말 많이 뺏, 아니 모았더라."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클락이 제 수첩을 펼쳤다. 노란 포스트잇이 군데군데 빠져나와있다.

 

"메일로 보내줬을텐데."

"내가 옮겨 적었어."

"스몰빌답군."

푸스스, 웃은 클락이 리스트의 맨 첫 번째 단어를 소리내어 읽었다.

 

"'레드벨벳 오레오.'"

"..."

"1년도 넘었었지? 드물게 네 퇴근시간과 내 퇴근시간이 겹쳐서 같이 밤거리를 걸었었어. 그 날은 봄인데도 좀 추웠고."

"크립토니안이 할 소린 아니군."

"자네 코만큼이나 내 코도 빨갛게 얼었었거든?"

가볍게 투정하는 목소리에 배트맨이 소리없이 웃었다. 클락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눈에 담는다.

 

"잠깐 편의점에 들려 따뜻한 거라도 마시려고 했는데, 자네가 간식을 찾았지. 딕에게 줄 오레오 오즈 시리얼을 하나, 자네가 먹고 싶은 오레오 하나를 사려고 했는데 다른 맛은 다 팔리고 레드벨벳 맛 하나만 남아있었어. 처음 먹어보는 맛이라며 미심쩍어하는 자넬 설득해서 샀는데... 음."

"맛 없었어."

"응... 그래도 못 먹을 맛은 아니잖아?"

"혼자 다 안 팔리고 남은 건 이유가 있는거야."

고집스러운 목소리에 이번엔 슈퍼맨이 웃었다. 숨기지 않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통, 통, 물수제비처럼 건너갔다. 음파에 존재할 리 없는 온기가 피부에 와닿는 것만 같다. 클락이 두번째 줄을 읽었다.

 

"'회색 텀블러.'"

"...그것만 아니었어도..."

안 들킬 수 있었어. 중얼거리는 말에는 약간, 토라진 기색이 숨어 있었다. 자존심이 상한 걸까? 클락은 모른척 하고

이야기를 이었다.

 

"《회색 고양이》카페에서 개업 기념으로 나눠준 증정품이지. 키스톤 시티에서 시작했는데 장사가 잘 돼서 메트로폴리스에도 지점을 냈었고."

"알아. 자네 회사에서 두 블럭 떨어진 곳."

"의도는 좋았는데, 제작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가게 상징인 고양이 음각이 전혀 되지 않아서... 귀여운 고양이 텀블러를 기대한 사람들이 많이 아쉬워했어."

"그 중 하나가 너였고."

밋밋한 회색 텀블러를 들고 와서 이것 봐 B, 원래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에 고양이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로 시작하는 하소연을 늘어놓던 걸 기억한다. 정말 속상한듯 울상인 표정에 그냥 네 히트비전으로 새기면 되잖아, 핀잔을 준 것도 기억했다. 그거랑 달라! B 너도 모든 물건에 박쥐 새겨놓으면서 왜 내 맘은 몰라! 억울해하는 목소리가 십 분 내내 끊이질 않자 웨인사에서 고양이 텀블러를 내줘야 만족하겠냐며 으르렁거리고 했다. 정말? 눈을 반짝거리는 걸 바쁘다고 내보내자 문 밖으로 밀려나가면서도 그거 만들면 꼭 말해줘야해! 다짐을 받았더랬다. 브루스 웨인의 일정표에 텀블러 기획-고양이 테마라는 메모를 적어둔 건 아직 비밀이었다.

 

"볼펜... 스타걸한테 얻어냈어? 자네도 참, 한 번 갖고 싶으면 못 말릴 사람이야."

"빔 때문이야."

"흐음."

눈을 반쯤 접고 얄미운 표정을 지은 클락이 손가락으로 몇 단어를 짚어갔다.

 

"5개에 7.99달러 묶음 볼펜, 노란 포스트잇, 체크무늬 표지의 다이어리와 일곱가지 색깔 압핀..."

"다 읽을 필요 없어."

"흠. B를 위해 언급을 생략한 열 여덟가지 사무용품들. 모두 어느 곳에서나 쉽게 살 수 있는 물건들이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쓰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도 있고. 그치?"

클락이 빙그레 웃었다. 태양을, 해바라기를, 데이지를 닮은 웃음이 시야 끄트머리에서 환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려다가, 꿋꿋하게 앞만 바라본다. 종이에 적힌 단어를 보던 클락이 의문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자튀김, 취소선 긋고, 할이 먹는 감자튀김...?"

"..."

"이건 정말 설명이 필요해."

"..."

"브루스?"

"...네가 더 잘 알텐데."

모르는데... 말꼬리가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축 처졌다. 어차피 넘어가줄 걸 알면서도 브루스는 최대한 입을 다물고 버텼다. 브루스... 브루스...? 나 정말 모르는데... 안 가르쳐줄거야? 점점 힘이 빠지는 음색 뒤에 힝, 소리가 따라붙을 것만 같았다. 배트맨이 부루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저번에 할이랑 감자튀김 먹었잖아."

"...내가?"

"불공평한 설명이었군. 네가 먹고 있던 감자튀김을 조던이 뺏어 먹었어."

"아아..."

기억난다. 언제였더라, 유난히 자잘한 일이 많아서 회의가 끊이지 않던 날이었다. 몇 시간씩 이어지는 회의에 뒤늦게 가방을 정리하다가 점심에 먹다 남은 감자튀김을 발견했었다. 버리기는 뭣해서 다 식은 감자튀김을 입에 넣는데 끝이 나지 않는 회의에 지쳐 반쯤 넋이 나가 있던 할이 감자튀김에 손을 뻗었다. 본인도 모르게 몇 개 가져가 먹고 으, 다 식었네... 하고 중얼거리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었다. 엇, 네 거였냐. 미안. 멋쩍게 사과하고는 민망했는지 다음 회의 때는 자리를 옮겼다. 너 왜 여기 있어. 모난 목소리가 추궁하자 내가 앉고 싶은 자리에도 못 앉냐며 툴툴거리는 게 보였다. 있던 자리로 가. 아 스푸키, 진짜 정없게. 내가 회의 때 너 방해한 적 있어? 있어. 뭐! 언제! 몇월며칠몇시몇분몇초!? 빽빽거리며 버티는 통에 브루스가 쯧, 혀를 차던 모습이 생생하다. 떠오른 이미지는 말하지 않고, 다른 걸 물었다.

 

"여러번 뺏어먹었다고도 되어있더라."

"..."

"할이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생각났어?"

"아니."

칼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랬구나. 클락은 비죽비죽 치솟는 입꼬리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얼굴을 숨기자 웃음이 더욱 겉잡을 수 없을만큼 퍼져나간다. 브루스가 질투했다니. 소리내어 말하면 내쫓길까봐, 혼자서만 거듭 되새겼다. 브루스가 나 때문에 질투했어. 유치하게 좋아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체인 잔해?"

"...리그 결성 후 첫 단체 전투. 네가 공격을 막아줬었어. 우린 그때 별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클락은 문득 깨달았다. 예전에는 쭉 브루스가 준비되기를 기다렸지만. 

 

"샤이에라가 그걸 보관하고 있었다니."

"그거 말고도 많이 있더라. 비밀이랬으니까 너도 지켜."

그게 그와 브루스 사이의 방식이었지만.

 

"아닌 척해도 정말 우리를 아낀다니까."

"응."

지금은, 그가 먼저 다가갈 때라고. 

 

"장미는?"

"...그걸 왜 물어봐."

클락이 천천히 걸어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브루스."

"말 안해."

"네가 말해주는 걸 듣고 싶어."

아주 가까이 다가가도 브루스는 그대로였다. 이 거리라면 크립토니안이 아니더라도 어둠 속에 숨겨두었던 붉은 귓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뺨까지 번진 수줍음으로 물든 브루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빌런빔에 맞고 회복한 다음날이었지."

"응."

"어느 멍청한 외계인을 돌보느라 하루가 꼬박 날아가서 난 정말 바빴고."

"맞아."

"하루종일 케이브에 있어도 일이 끝나지 않았어. 그런 상황에서 방문객은 성가실 뿐이라고."

"미안해."

"근데도 멍청한 외계인은 새벽이 다 지나도록 계속 기다리더군."

"네가 보고 싶었거든."

"장미 꽃다발이라니, 언제적 클리셰인지."

"'스몰빌'이라, 구닥다리밖에 몰라."

어느 도련님께는 한참 못 미칠 안목이지. 속삭임과 함께 손을 뻗었다. 빨갛게 익은 귀를 살짝 스친다. 파르르, 떨리는 몸을 숨기려고 브루스는 몸에 힘을 꽉 주었다. 귓바퀴를 지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준 손가락이 긴장으로 팽팽해진 눈 근처를 어루만졌다. 섬세한 속눈썹을, 오뚝한 콧날을, 부드러운 입술을 닿을듯 말듯 내려와, 아닌척 가운을 꽉 붙잡은 손으로 다가간다. 손등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움켜쥔 주먹을 조심스레 폈다. 허락을 구하듯, 손가락 하나씩 깍지를 낀다. 아주 살짝, 마주 깍지를 껴오는 힘이 느껴졌다. 브루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침대 위 봤어?"

순간 혀를 깨물 뻔한 클락이 헛기침을 했다.

 

"아, 아니?"

"왜 당황하는데?"

"알ㅍ... 아, 아니야. 침대는 왜?"

브루스가 말없이 커튼 줄을 잡아당겼다. 밤하늘같은 천이 걷히고 안쪽이 드러난다. 세 사람은 족히 누울 수 있는 넓은 침대는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다. 텀블러, 볼펜, 포스트잇... 협탁 위에는 망가진 철 조각과 반쯤 먹은 오레오 봉지가 놓여 있다.  베개 위에 소중히 놓아둔 장미 다발은 다 말라있었지만 형태는 온전했다. 슈퍼맨을, 클락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든 잡화들이 가운데 누웠을 사람을 중심으로 둥지를 만들었다. 이게 한계였다. 조심, 또 조심하며 좁힌 거리가 무색하도록, 잔뜩 벅차오른 클락이 와락 브루스를 껴안았다.

 

"...!!!"

"브루스으으..."

"뭐야, 저리가!"

"나도 정말 좋아해..."

"당장 떨어지라니까!"

"정말 한참 전부터 좋아했어..."

"보이스카웃, 농담 하는 거 아니니까 당장 떨어져!"

싫어, 못해. 훌쩍거림과 함께 클락이 품 속에 가둔 브루스에게 머리를 부볐다. 팔 안에 꽉 들어차는 부피가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다. 버둥거리던 몸짓이 뚝 멎을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브루스가 그를 불렀다. 묘하게 열기를 띈 음색이다.

 

"스몰빌."

"응, 브루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지?"

"귀엽고 사랑스럽고 너무너무 좋은 상ㅌ..."

"배트-플래시빔."

아.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맞아, 브루스는 지금 정상이 아닌... 

 

"으앗...!"

순식간에 침대로 밀어눕혀진 클락이 얼빠진 표정으로 몸 위에 올라탄 브루스를 쳐다봤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탄탄하면서도 살집 있는 허벅지가 그를 꽉 누르고 놓아주지 않는다. 자세가 자세다보니 클락의 손이 브루스의 허벅지를 살짝 잡았다.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살결에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 위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미안! 일부러 만진 거 아니야! 허둥지둥 사과하는데, 머리맡에 익숙한 감촉이 잡혔다. 들어올리고 보니 클락의 타워 내 개인실에 있어야 할 담요가 보였다.

 

"브루스 이거 내 담요야...!?"

"응."

"아니, 언제? 어떻게?? 왜???"

"말했잖아, 빔의 효과는 내가 제어할 수 없다고."

"훔쳤어???"

"안 그랬다면 더 큰 걸 훔쳤을걸."

"그건 사과가 아니잖... 으아앗...?!"

"내가 이럴까봐 널 안 본거라고."

"B, 브루스, 진정하고 잠깐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래, 벗겨먹고 싶을 거 같았지. 이렇게. 말이야."

꺄아악, 새된 비명을 지른 클락이 순식간에 단추째로 뜯겨나간 와이셔츠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찢겨서 실밥이 다 너덜거리는 옷을 브루스가 꽉 끌어안았다. 클락이 보는 것도 아랑곳않고 천 조각에 얼굴을 묻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 모습이 귀여워보였다. 중증이다. 코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안경도 빼앗겼다. 끌어안은 셔츠를 놓지 않고 안경을 얼굴에 쓴다. 수수한 검은 뿔테는 화려한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다. 안경알 너머로 얼음처럼 시린 눈이, 평소보다 좀, 많이 풀려있는 눈이 샐쭉 웃는다. 클락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우수수 켜졌다. 삐용삐용 울리는 환청과 하체에 딱 맞붙은 브루스의 몸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벨트가 풀렸다. 브레이크가 풀린 박쥐가 벨트를 목에 감았다. 클락으로서도 정말 당황스러운 생각이었지만 그 모습이 꼭, 그러니까, 동물용 목걸이를 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클락의 바지속에 손이 쑥 들어왔다. 

 

"브, 브루스, 그... 그만 둬!"

"난 경고했어."

"언제?!"

클락이 비명을 지르며 바지를 쭉 내리고 제 속옷을 잡은 손목을 절박하게 움켜쥐었다. 넉넉한 트렁크는 특정 부위의 신체에 발생한 변화 때문에 빠듯해져 있었다. 그리고, 맹세컨대 클락이 잘못 본게 아니라면, 브루스가 그 부위를 보고 입술을 핥은 것도 같았다. 세상에, 오 라오시여. 제가 이 유혹을 이겨낼 의지를 주세요.필사적으로 손에 힘을 준-손목을 부러뜨리지 않는 동시에 속옷을 벗기지 않게 막으려면 정밀한 컨트롤이 필요했다-클락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브루스! 이건 내 경고야! 여기서 멈추고 우리 차분히 대화를...!"

감은 시야에 훅, 향기가 끼쳤다. 살구 향 아래 더 짙은 체취를 감지한 클락의 머릿속에 말그대로 하얀 섬광이 번득이며 지나갔다. 발전소 전체가 만들어내는 전기를 뇌에 직접 맞아도 이 자극보다 약하리라. 눈을 질끈 감고 가련하게 떨고 있는 외계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고담 황태자가 나른하게 웃었다. 빌런빔은 조심해야하는 거라고, 미리 말했었잖아. 킥킥, 배트맨보다 브루시가 낼 법한 웃음소리가 클락의 피부를 매혹적으로 쪼아댔다. 입술에 닿을락 말락 숨결이 내려앉고, 박쥐가 속삭인다. 넌 전부 내거야. 그렇지? 

맨 오브 스틸, 내일의 사나이.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한 슈퍼맨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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