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명한 의사이자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 토마스 웨인은 최근 심각한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해마지않는 아들, 브루스 웨인 때문이었다.
누구나 돌아볼 정도로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키, 뛰어난 언변과 훌륭한 매너를 겸비한 그는 제 아버지처럼 촉망받는 의사였고 차기 기업 후계자로 고담 사교계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어디 그뿐이랴. 재벌임에도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를 다니며 누구나 평등하게 대했고 자신의 배경을 내세워 거만하게 굴거나 잘난 체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돈도 많고 성격도 좋은 데다가 사회적 지위까지 높은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다.(토마스는 이 평가가 객관적이라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크나큰 고뇌의 원인이 되다니.
토마스는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문질렀다. 물론 자식을 키우다 보면 별별 문제가 다 생기기 마련이고 아무리 착한 아이라도 말썽부리는 일이 전혀 없지 않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브루스 또한 고집이 세서 애를 많이 태웠고 가출까지 감행하며 속을 썩이던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설마 반항적인 면이 아닌 연애가 갈등의 시초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주인님. 한숨이 나올 정도로 제 요리가 형편없다면 이만 치워드리겠습니다."
"앗! 오, 미안해요 알프레드. 그게 아니라...!"
"식탁 앞에서 계속 딴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혼나는 거잖아. 커피 더 주실래요?"
"알겠습니다, 사모님."
핀잔을 던진 마사가 슬쩍 커피잔을 들어 올리자 알프레드는 접시를 치우려던 손을 물리고 우아한 걸음으로 포트를 가지러 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집사에게서 아침 식사를 사수한 토마스는 멋쩍게 웃으며 잘 구워진 베이컨을 황급히 입안에 쑤셔 넣었다.
솔직히 그는 자신이 고리타분하거나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마사와의 결혼도 두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쟁취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식한테 제약을 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토마스는 브루스도 자유롭게 만나고 사랑하기를 바랐다. 부모로서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상대한테 큰 결점이 없다면 간섭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브루스가 사귀는 사람이 다름 아닌 슈퍼맨이었기 때문이다.
슈퍼맨이 어디가 어때서? 오히려 좋은 거 아냐?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토마스도 한때는 그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정의와 희망의 상징. 메트로폴리스의 위대한 영웅. 엄청난 능력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주고 곤경에 빠진 이들을 도와주는 선하디선한 존재. 그런 경이로움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는 곧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이것은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문제였던 것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잘 잤니?"
기다리던 목소리에 토마스는 눈을 번쩍 떴다. 출근 준비를 마친 브루스가 식당으로 들어와 마사의 뺨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토마스는 서둘러 음식을 삼킨 후 텁텁한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아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흠흠. 브루스, 얘야."
"네?"
"아직도 칼이랑 만나고 있니?"
순간 마사가 인상을 확 찡그리면서 빠르게 눈짓을 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마사의 신호를 일부러 모른 척 외면했다. 원래 식사 자리에서 민감한 주제는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며칠 동안 서로 바빠 잘 만나지 못했기에 대화를 나눌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것이다. 역시나 브루스의 표정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요?"
"내 의견은 변함이 없단다. 힘들겠지만 더 이상 만나지 말 거라. 응?"
토마스는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타일렀다. 여차하면 '제발 부탁이다' 라는 단어까지 입에 올릴 기세였다. 하지만 브루스는 미간에 힘을 꾹 주더니 뾰족한 태도로 쏘아붙였다.
"아버지께서 상관하실 일이 아니에요."
"나도 이런 말 하기 싫다. 항상 널 응원하고 지지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는 슈퍼맨이잖니. 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칼은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그가 얼마나 자제력이 강한지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그래. 알지. 허나 안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아."
고개를 저으면서 다소 단호하게 말하자 브루스의 안색이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몹시 불쾌한 기색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이쪽을 노려보는 모습이 마치 심통 난 어린아이 같았다. 왜 이해를 못 하지? 다 저를 위해서 그러는 건데. 괜스레 마음이 답답해지자 토마스도 조금씩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참자. 여기서 흥분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돼. 그는 스멀스멀 피어나는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 한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보렴. 나는 칼의 개인적인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들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란다. 성격은 물론이고 남자인 것도, 하물며 외계인인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그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은 참을 수가 없구나."
"그건 칼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나쁜 건 빌런들이라고요!"
"'슈퍼맨'을 잡고 싶은 빌런들이지."
순간 브루스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정곡을 찔려 아무 말도 못하는 그를 향해 토마스는 한층 냉정한 음성으로 토로했다.
"너도 인정하잖니. 슈퍼맨과 열애설이 터지자마자 네 신변의 위협이 몇 배나 늘었다는 걸."
"그, 그건 인정하지만...멋대로 행동한 건 저예요. 칼은 아무 책임 없어요."
얼마 전 무장 단체한테 인질로 잡힌 브루스를 슈퍼맨이 멋지게 구해주는 일이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슈퍼맨의 행동을 찬양하고 끝났을 테지만, 문제는 브루스가 고맙다며 입술에 찐한 키스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심지어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말이다. 그 장면은 곧 각종 신문사와 언론 매체에 대대적으로 뿌려졌고 온갖 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 남자는 '영웅과 고담 황태자의 세기의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토마스는 기분이 나빠져 포크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책임이 없다고 하기에는 해명도 안 했잖아. 수습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제가 막았어요. 칼은 반대했지만─"
"데일리 플래닛의 로이스 레인 때문이지? 슈퍼맨과 스캔들이 난 사회부 기자."
평평했던 이마가 수치심에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번에도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맞다는 증거를 애써 털어낸 브루스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맞아요. 질투 났어요. 아무튼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거냐?"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처리한다는 거잖아요."
"브루스."
"아,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지지 않고 끈질기게 재촉하자 브루스는 짜증이 났는지 대놓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역시 그냥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게 분명했다. 예상했던 반응에 토마스는 혀를 쯧 찬 다음 친절하게 풀려던 분위기를 거두고 강경하게 명령했다.
"됐다. 긴말할 거 없이 지금 당장 정리하거라. 매스컴에는 내가 알아서 설명하마."
"네? 싫어요! 고작 그런 걸로 헤어지라니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고작? 고작이라고? 한 달 사이에 스무 번이나 납치당하고도 그런 말이 나와?!"
토마스는 기가 막혀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속에 담아 두었던 감정들이 폭탄처럼 터져 나와 일제히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냐? 가는 곳마다 이상한 놈들한테 습격당하고 하루에도 수십 통씩 협박문자가 날아오고 수상한 소포가 배달되고! 감금에 폭행에 스토킹에 온갖 궂은일은 다 당하고 있잖니! 가뜩이나 돈을 노리는 범죄자들이 많아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슈퍼맨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 역할까지 해? 오죽하면 경호원들이 일주일마다 사표를 내겠어? 이거 어디 불안해서 살겠니? 게다가 그때마다 다치고 입원하고! 더 이상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그중 절반은 미수였거든요? 그리고 전부 슈퍼맨이 구해줬잖아요! 저스티스 리그에서도 와줬고요!"
"애초에 엮이지 않았다면 도움받을 일도 안 생겼겠지! 여태까지 무사하다고 계속 괜찮을 거란 보장이 있어? 슈퍼맨도 무적이 아니다! 철부지 같은 소리 좀 그만하거라!"
"아버지는 왜 매번...!!"
"그만."
그때 침착한 목소리가 공기를 묵직하게 가로질렀다. 계속 높아지던 언성이 뚝 끊어짐과 동시에 마주 보고 있던 두 개의 시선이 한 곳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다시 채운 커피를 조용히 음미하면서 마사가 나직이 상황을 바로잡았다.
"둘 다 진정 좀 해. 이러다 끝이 안 나겠어. 그리고 브루스? 아까부터 계속 콜이 울리는구나. 서둘러야 하지 않니?"
"...죄송해요. 아무리 뭐라 하셔도 저는 칼과 헤어질 생각이 없어요. 먼저 갈게요."
"기다리거라! 브루스!"
토마스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브루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갔다. 이미 떠나버린 뒷모습을 망연한 얼굴로 쫓던 그는 도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여보오."
"그러게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하여간 아빠나 아들이나 참 말을 안 들어."
"미안해. 하지만 더는 브루스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당신도 걱정되지 않아?"
"당연하지. 나도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야.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잖아. 둘이 좋다는데 어쩌겠어?"
마사는 너그럽게 이야기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래. 마사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브루스한테 칼-엘에 대한 걸 알려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토마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사실 토마스는 오래전 슈퍼맨의 아버지 조-엘이 보낸 탐사선을 통해 아직 멸망하지 않은 크립톤 행성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만약 칼-엘이 지구에 오게 된다면 친자식처럼 돌봐주겠다고 약속까지 나눴다. 그래서 슈퍼맨의 정체가 칼-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토마스는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려 노력했다. 또한 브루스가 둘이 연인 사이임을 고백했을 때도 놀라긴 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축하를 건넸다. 어쩌면 둘을 이어지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 아닐까 기뻐하면서. 그런데 그것을 지금 와 후회하게 될 줄이야.
"나도 칼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아.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결국 피해를 입는 건 우리 브루스니까."
아무리 예방하고 대비해도 모든 범죄를 막을 수는 없다. 작정하고 쳐들어오는 미친놈들을 어떻게 전부 감당하겠는가? 슈퍼맨이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러니 난 포기 못해. 설령 원망을 받게 되더라도 내 자식은 내가 지키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토마스는 결심을 굳힌 듯 머리를 휙 치켜들고 확고하게 못을 박았다. 그 당당한 기세에 마사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흡족하게 웃기 시작했다.
"어머나 멋지네. 당신이 그러고 싶다면 더는 말리지 않을게. 이따 밤에 잘 얘기해 봐. 브루스도 반성하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그냥 지켜볼 거야?"
"일단은. 하지만 정 안 되면 직접 담판을 지을 작정이야."
"누구랑?"
"누구겠어?"
마사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되묻더니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틴케이스를 꺼내 천천히 열어 보였다. 작은 공간 속에 구술처럼 동그랗게 가공된 초록색 광석들이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저건? 토마스의 동공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그걸 어디서 구한 거야?"
"다 방법이 있지."
"역시 당신이 최고야, 마사."
"이제 알았어?"
자신만만한 태도로 찡긋 윙크를 하는 마사의 모습에 토마스는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평생 그녀를 당해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어서 오세요, 해리슨 씨."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웨인 씨."
토마스는 악수를 하면서 손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늘 자선 파티는 대성공이었고 고아들을 위한 기부금도 순조롭게 마련되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호원을 2배 늘리고 저스티스 리그에 슬쩍 지원을 요청한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마침 슈퍼맨도 다른 임무로 자리를 비웠다 하니 껄끄러운 기분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예의 바른 미소를 띤 채 한창 접대에 열중하던 그는 불현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곁에 있는 마사에게 귓속말을 했다.
"브루스가 안 보여."
"응?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쪽에 있었는데?"
"쉬러 갔나? 잘됐군. 찾아봐야겠어."
"싸움은 금지야."
"알았어. 다녀올게."
가볍게 입을 맞춘 토마스는 양해를 구하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홀을 쭉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브루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예 파티장을 빠져나간 듯했다. 어디로 갔을까. 발코니? 정원? 서재?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전화를 하는 대신 알프레드를 불렀다. 훌륭한 집사는 역시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련님께서는 3층 응접실로 가셨습니다."
"고마워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면서 토마스는 브루스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정리했다. 우선 아침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기분이 풀리면 살살 달래서 슈퍼맨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하도록 설득해야지. 그것만으로도 쓸데없는 사고를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꾸준히 위험성을 호소하고 납득시키면 언젠가 자연스레 멀어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마지막은 거의 희망 사항이었지만 현재로서는 큰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토마스는 응접실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똑똑 노크를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별다른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다른 곳으로 간 걸까? 고민하던 그는 확인 차 손잡이를 돌려 문을 조금 열어 보았다. 그러자 안쪽에서 희미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슈퍼맨도 멋지지만 기자님이 훨씬 더 사랑스럽네요."
장난기가 매끄럽게 흐르는 것이 틀림없는 브루스의 음성이었다. 혼자 있는 게 아닌가? 토마스는 잠깐 망설이다가 곧장 안으로 직행했다. 대화가 끝나면 잠시 보자고 미리 전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격한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놀라서 크게 확대된 눈동자에 비친 것은 긴 소파 위에 뒤엉켜 있는 덩치 큰 두 남자였다. 그들의 옷과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상태였고 붉게 물든 얼굴과 서로를 더듬는 손길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두 남자도 갑자기 나타난 토마스 때문에 당황한 듯 우뚝 굳어 있다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아, 아버지?? 여긴 어떻게...노크할 줄 몰라요?!"
"...어...어...?! 아, 안녕하세요 웨인 씨? 저기 그러니까 이건...아니 저는...그게......"
토마스는 소스라쳐 고함을 빽 지르는 브루스를 지켜보다가 허둥지둥 허리를 굽히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브루스의 밑에서 기어 나와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고 셔츠 단추를 급하게 꿰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미간을 좁히고 사내를 빤히 주시했다. 누구지? 브루스한테 다른 애인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가만. 그러고 보니 왠지 익숙해. 어디서 봤지? 어물어물하는 얼굴을 한참 살피던 그는 문득 남자의 가슴에서 달랑거리는 출입증을 발견했다. '데일리 플래닛 클락 켄트' 라고 반듯하게 인쇄되어있는 글씨가 뇌리에 콱 박혔다. 클락 켄트? 그 찰나 흐릿했던 기억에 반짝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불편할 정도로 어색한 침묵이 자꾸 길어지자 브루스는 민망함을 견디지 못하고 재차 짜증스럽게 외쳤다.
"언제까지 보고 계실 거예요! 빨리 나가세─!"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좋은 시간 보내렴."
그 말을 중간에 끊어버린 토마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손수 문까지 잠가준 뒤 크게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맞아, 클락 켄트. 예전에 그가 쓴 기사를 몇 번 읽은 적이 있다. 로이스 레인한테 밀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제법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던 기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브루스와 저런 사이가 된 거지? 의아하긴 하지만 마침 잘됐다. 단순한 원나잇이든 아니든 이건 기회였으니까. 브루스와 슈퍼맨을 떨어뜨릴 절호의 기회. 비록 제 자식의 낯뜨거운 치부를 알게 되어 속이 뒤틀렸으나 이 일을 계기로 둘이 헤어지게 된다면 이번만큼은 쌍수 들고 환영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남자는 슈퍼맨보다 나을 테니 말이다. 토마스는 무의식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발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신이 응답한 것일까. 며칠이 지나자 놀랍게도 브루스가 먼저 슈퍼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은 따로 교제하는 사람이 있음을 공식 발표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았으나 곧이어 슈퍼맨 측에서도 좋은 친구일 뿐이라며 선을 긋자 여론은 금방 뒤집혔다.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였던 만큼 소동을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다행히 브루스가 납치당하는 횟수는 이 전에 비해 수직 하강했고 습격해오는 빌런들도 차츰 줄어들었다. 이에 토마스가 뛸 듯이 기뻐했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걱정과 고민으로 어두웠던 얼굴은 이제 하루종일 싱글벙글했다.
상황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
새털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새파란 하늘 아래 드넓은 옥수수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긴 울타리를 따라 정비되지 않은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리던 고급 세단이 한 농장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리는 웨인 일가를 향해 미리 마중 나와 있던 켄트 부부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웨인 씨. 조나단 켄트입니다."
"토마스 웨인입니다. 편하게 토마스라 불러주십시오."
토마스는 반갑게 인사하며 굳은살이 배긴 손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켄트 부부의 첫인상은 짐작한 대로 인자하고 선량했다. 클락 켄트한테서 느껴지던 밝은 순박함은 역시 제 부모를 닮은 모양이었다. 토마스는 겸손한 태도로 마사 켄트와도 인사를 나눴다.
"캔자스에는 몇 번 와봤지만 스몰빌은 처음입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로군요."
"고담에 비하면 작은 마을이지요. 계시는 동안 편안히 머물다 가세요."
"감사합니다."
"클락은요?"
켄트 부부와 포옹하던 브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사 켄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지붕을 고치고 있단다. 클락! 어서 이리 내려오렴!"
그녀의 부름에 지붕 너머로 클락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들더니 서둘러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토마스는 순간 너무 놀라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클락이 마치 중력을 거부하듯 가볍게 떠올라 이쪽으로 쏜살같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어버버 거리는 토마스를 지나친 클락은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선 브루스를 부둥켜안고 땅에 발을 디뎠다.
"어서 와 브루스! 어서 오세요, 부인. 웨인 씨."
"클락은 지붕을 고칠 줄 아는군요. 대단하네요."
"일손이 많이 부족해서요."
"저도 자동차 정비는 할 줄 알아요, 어머니."
"자, 잠깐! 잠깐! 왜 클락이 하늘을 나는 거냐? 설마 클락도 메타휴먼이었어?!"
비명처럼 울려 퍼진 토마스의 지적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급속도로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빠르게 번지는 정적 속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마사가 브루스를 쿡 찌르며 소곤거렸다.
"브루스. 너 설마 말 안 했니?"
"저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실 줄 알았죠."
"무슨 말이야? 마사? 브루스?"
당황해서 빨리 설명하라고 손짓하자 브루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망설이는 것처럼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후우 숨을 뱉은 뒤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클락이 칼-엘이에요."
"...뭐...뭐라고...?"
"클락이 슈퍼맨이라고요. 시크릿 아이덴티티라서 미리 말씀 못 드렸어요. 죄송해요 아버지."
브루스는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숙여 진심으로 사죄했다. 하지만 이미 토마스의 귀에는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클락 켄트가 실은 칼-엘이라고? 슈퍼맨이라고? 그럼 둘이 헤어진 게 아니었단 말이야? 오, 세상에. 나는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좋아서─!!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동안 자신의 여러 행적들이 해일처럼 한꺼번에 뇌리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던 토마스는 결국 충격적인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쿵 쓰러지고 말았다.
"여보!"
"아버지!"
"웨인 씨!"
깜짝 놀라서 달려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토마스는 어금니를 으드득 갈았다. 미안하네, 조-엘. 아무래도 당분간 약속은 지키지 못하겠어. 들릴 리가 없는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면서 그는 앞으로 브루스를 무작정 믿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