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객관적인 현상만 놓고 판단하자면 찢어지게 좋은 날이었다. 알프레드가 깨우기 전에 눈이 번쩍 떠졌는데도 피곤하지가 않고 개운한 데다가 날씨조차 완벽했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 선선하게 부는 바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시도 때도 없이 도로를 가로지르는 사이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슈퍼맨의 특별 제청으로 고담과 메트로폴리스가 ‘특수치안강화구역’으로 시범 통합된 지 한 달만에 나타난 결과였다.
우리에겐 배트맨이 있다며 슈퍼맨의 간섭을 반대하고 나섰던 이들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의제가 한창 논의되던 동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고담시가 일방적으로 도움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라는 점 때문에 결국 시 경제가 메트로폴리스에 종속될 것이라 주장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지만, 이들도 역시 태도를 바꾸었다. 사욕 없는 슈퍼맨, 정의로운 슈퍼맨, 의로운 슈퍼맨. 슈퍼맨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뉴스 소리가 귀에 거슬려 처음으로 정해 놓은 시간 전에 라디오를 꺼 버렸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나도 잘 안다.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이 밤마다 박쥐를 형상화한 옷을 입고 거리를 돌며 범죄자를 때려 눕히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하는 짓이 법 테두리 안에서 용납받지 못할 일이라는 것도 알고.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건 고담은 '내' 도시였다. 브루스 웨인과 염문설이 인 (사랑했던 게 아니야.) 스몰빌 출신 기자 나부랭이가 자기 이름 걸고 쓴 기사에 나왔듯 <두 영웅이 공존하는 이상 예전과 같은 위험은 두 번 다시 찾아보지 못할> 도시도 아니었고, 모두가 보는 가운데 하늘에 둥둥 떠서 슈퍼맨이 밝힌 <배트맨이랑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의 발판이나 되어 줄 도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늘 하나 없는 웃음에 눈이 멀어 대부분이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는 고담을 향한 모욕이자 나를 멸시하는 행위였다.
알프레드가 들었다면 단어 선택이 평소보다 과격하니 자중할 것을 요청했으리라. 그게 문제였다. 평생을 내 집에 머무르며 옆에서 나를 보필해 온 집사까지 나한테 충분히 공감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나서 말을 나눠 보시죠. 집 앞까지 찾아왔는데 오늘도 그냥 보내시려구요. 이제 정신 차리셔야 할 때입니다. 브루스 주인님!
솔직히 어디까지가 알프레드 입에서 나온 말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정신 차리라고 채찍질한 것은 내가 만들어낸 말일 가능성이 농후했으나, 일단 다른 건 내 귀로 확실히 들었다. 피해 망상일까? 아이비의 독에 취했을 때도, 스케어크로우가 만든 공포 가스를 흡입했을 때도, 심지어 조커에게 공격을 다해 부상을 입었을 때도 허상만큼은 정확하게 골라냈다 자부한다. 이게 다 슈퍼맨 때문이었다. 아무도 저택에 들이지 말고 내 허락 없이 밖에 나가지도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알프레드가 나 대신 슈퍼맨을 따라간 것도, 전부 슈퍼맨 탓이다.
내가 무슨 이유로 슈퍼맨을 좋게 봤는지 의아하다. 클락 켄트는 위선 덩어리, 딱 그 정도였다. 지금 내가 이만큼 화가 나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신이있다면바로슈퍼맨이신일까. 사실 그는 이름부터가 참 우스꽝스러운데, 그것도 못 알아보고 무겁게 닫았던 문을 열어 그를 내 마음에 한순간이나마 들였던 것이 부끄러웠다. 클락 켄트란 이름은 너무 촌스럽고, 슈퍼맨이란 이름은 너무 과장됐다. 그는 전혀 슈퍼하지가 않았다. 그동안 천천히, 조심하며 모아 둔 크립토나이트 더미에서 가장 작은 한 조각만 들고 와도 슈퍼맨은 일개 인간에게 맞고 멍이 드는 인간이 되었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낸 결론은 고담에서 슈퍼맨을 몰아내야 한다는 결론이어야 한다고 본다. 슈퍼맨은 위험한 인물이었다. 매우 음흉해서 나 말고 아무도 그의 속내를 모른다. 크립토나이트는 치워야 하지 않을까? 슈퍼맨이 안다면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변명의 여지 없이 내가 그의 손에 먼저 죽고 말아 고담은 결국 해방되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 메트로폴리스에 속한 채로. 배트맨이 필요없는 도시가 될 것이다, 고담은. 하지만 나는 알려야 했다. 슈퍼맨이 조커를 죽인 순간부터 고담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가 믿어주고 누가 알게 될 것인가? 로이스를 잃은 슬픔을 나도 알아.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을 내가 아니면 누가 알겠어, 클락. 내가 알고 내가 공감해. 조커를 죽이지 않은 나의 잘못이야. 그러니 화를 낼 때 내더라도 나에게 내고 그를 죽여서는 안 돼. 그게 조커가 원하는 바고. 재시작, 재시작, 재시작.
객관적인 현상만 놓고 판단하자면 찢어지게 나쁜 날이었다. 알프레드는 나를 떠나고 없고, 슈퍼맨은 고담을 지배했고, 배트맨은 고담에서 사라졌다. 주위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모두가 죽어 널브러진 가운데, 슈퍼맨이 허공에 떠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에 멍이 든다. 내가 슈퍼맨을 죽일 수 있는가? 나는 왜 슈퍼맨에게 복수하려고 하는가? (지금 내 옆에는 집사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내 어깨에 손만 올리고 서 있는 집사가.) 나는 왜 살인을 저지르려 하는가? 슈퍼맨을 죽이는 것밖에 길이 없기 때문인가? 공중에떠있는저사람이슈퍼맨이맞기는한가나를둘러싼도시가현실이기는한가왜나는생각을전개하지못한채똑같은사고만반복하고있는가왜나는.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을 찢고 뉴스가 나왔다. 슈퍼맨이 고담 복구 작업에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이제야 기억났다. 그가 고담을 무너뜨렸다. 배트맨보다도 그를 믿고 의지하던 도시를. 그래, 클락. 자네가 먼저 나를 배신한 거야. 나는 위험하지 않아. 나는 고담을 위할 뿐이지. 자네를 고담에서 내쫓기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자네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알프레드, 잠깐만 와 줄래요? 방금 떠오른 계획을 말해주고 싶어서요. 가장 완벽한 자를 죽이기 위한 계획이니 이보다 철두철미한 건 없다고 보거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같이 검토해 봐요.
/ 인저숲뱃, 소리. 끝.
